일신 상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평일을 보내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퇴근 후 약속이 늘었다는 점이다.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인건 변함 없지만, 이전에는 늦게 퇴근하는게 기본이라 퇴근 후 약속 잡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저녁 이후 시간이 내 것인듯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시절과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해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약속이 많이 생겼다.
약속이 많아진다는건 곧 점점 얇아지는 지갑,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엿보고 있는 술 배와 연결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또한 늘어나고 있다. 만나는 이 중에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으나 자주 보지는 못했던 이도 있고, 최근에야 인연을 맺게된 이도 있다. 만남의 시작과 과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반가움은 같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통찰력 넘치는 절묘한 선언이다. 나 또한 그렇지만, 마주 앉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삶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덤덤한 표정으로 현재 주된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통을 잠시 잊게해줄 술이 앞에 놓여있다. 짠 하고 잔이 부딪힌다. 술술 넘어간다.
이제 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방금 들려준 고민에 대해 이리저리 분석하고 나름의 조언을 던진다. 상대방의 사정을 100%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도 상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의 조각을 이어 붙인다. 이어 붙이다보니 그럴 듯한 말들이 짜여진다. 슬쩍 살피니 얼굴이 조금은 환해진 것도 같다. 연신 고개도 끄덕끄덕거린다. “역시 난 통찰력 있어” 더 신나서 이야기한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분명 마주 앉은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 스스로에게 던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조언들이었다. 내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나와는 상관 없는 듯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면서 정작 나 자신은 별다른 변화나 노력없이 지금처럼 계속 살려는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의식적으로 옆에 밀어둔채 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중이 되기는 싫다. 다른 사람의 머리를 깎아주기 전에, 내 머리부터 먼저 깎고 싶다. 아니 내 머리는 물론 다른 사람의 머리도 깎는 그런 중이 되고 싶다. “제대로” 깎는 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