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우는 그렇다.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해야만 할 때, 책이 가장 그리워진다. 책이 그리워질 때면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주문한다. 금방이라도 전부 읽어버릴 듯한 기세로 말이다.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며 김두식 교수에 대한 좋은 느낌이 생겼다. 그 좋은 느낌이 “불편해도 괜찮아”를 결제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영화를 사례로 살펴보는 인권 이야기라니, 읽고 나면 교양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만 꼽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중 하나를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 시기, 그 환경,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소설과 비슷한 경험이지만,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영화의 경험은 소설의 그것보다 강렬하다. 해볼 수 없던 경험을 짧고 굵게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짧고 굵은 새로운 경험이라는 건, 영화가 뿌리를 두고 있는 관점과 세계관을 빠르게 수용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가 편견과 왜곡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반복적으로 투영된다면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빠지게 된다.
“300”을 인용해 장애인 인권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페르시아인이 흉측한 괴물로 묘사된 점에 대해 계속 불편한 감정이었던 건 기억난다. 하지만 신체 건강하지 않은 아기는 버리는 스파르타인이나 장애인으로 묘사된 스파이에 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었다. 아니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평소 장애인을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왔던 시간들에 한방 펀치를 날렸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인권이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겁하는 것이라고. 간단한 명제이지만 쉽지 않은 명제이기도 하다. 늘 따르고 싶지만, 좌절하는 명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과연 인권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깊은 의문과 불확실성을 남긴 채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