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이별공식

책장에 틈 없이 빽빽해질 때면 중고로 팔 책을 고르게 된다. 내가 삼은 기준은 세 가지였다. 그 책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있는지, 읽겠다고 꺼내더라도 부담이 덜한지, 그리고 다시 읽는 시점에 충분히 활용 가능한 내용인지이다. 어제서야 다 읽은 ‘사피엔스’를 예로 들어보자. 읽으면서 다음 장이 기다려졌을 만큼 흥미로웠고, 내공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위 기준에 비춰보니 두 번째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어마 무시한 두께가 위압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인생학교: 일’의 경우는 나를 당황시켰다. 읽은 게 분명한데, 어떤 내용이 담겼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몇 장 넘기다 보면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첫 번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디선가 본듯한 뻔하디 뻔한 내용이 책에 꾹꾹 눌러 담아져 있었다. 이후에 읽은 비슷한 내용을 담은 수많은 기사와 블로그 글들에 기억이 덮인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팔기로 결정한 책들을 상자에 들고 택배를 부치러 가는 중에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기억하지도 못할 내용이라면 그 책을 고른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제대로 읽지 못한 내 잘못일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방이 넓고, 책장이 넉넉했다면 이렇게 책과 이별하는 일이 없을 것을!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택배를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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