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물생심

방 한켠에 캐리어가 세워져 있다. 며칠 전 물 건너온 새 캐리어다. 이번 8월 예정된 동생과의 유럽여행을 위해 하나 장만했다. 네 바퀴 달린 기내용 캐리어가 집에 하나뿐이었다. 둘이 가려면 하나가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 하던 차에 마침 캐리어 추천 글을 보았다. 댓글에 언급된 “제로그라”라는 모델을 찾아보니 우리나라 쇼핑몰에서는 없었다.

무엇인가를 살 때는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 한 가지 이유에 설득당하면 그대로 지갑이 열린다. 이 경우에는 엔화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경제 전문가의 예측이 절대적이었다. 평소에는 경제 전문가 예측을 거의 믿지 않지만, 이럴 때는 왠지 믿고 싶어 진다. 라쿠텐에서 결제하고 발송되었다는 메일이 온 다다음날 퇴근하고 택배 상자와 마주했다.

포장을 풀고 살펴보니 실물이 더 만족스럽다. 가볍기도 가볍거니와, 적당히 진한 남색 색감이 마음에 든다. 바퀴 굴림도 어찌나 부드러운지 환상적이다. 보통 베란다 창고에 넣어두는데, 더 이상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방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캐리어가 보이니 마음이 동한다. 저 곱디고운 캐리어를 그냥 세워두는 건 마치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침 요즘 매사에 의욕도 없고, 힘이 솟질 않던 터라 여행 생각이 간절해졌다. 마침 황금연휴라는 5월 초가 눈 앞이다. 항공권 비교 앱을 설치해 몇 군데 찾아본다. 시즌이 시즌이다 보니 항공권 가격이 만만치 않다. 마음을 접고 앱을 지우지만, 다시 캐리어를 보면 마음이 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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