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아무런 말도 없다. 앞에 놓인 카드 2장을 몸 쪽으로 끌어당긴다. 심호흡을 하고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아무도 볼 수 없게 조심하며 카드를 뒤집는다. 이정도면 나쁘지는 않다.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들 표정을 살핀다. 다양한 표정이 섞여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까. 이번 판은 어떻게 풀어나가야할까.
아는 형 동생들과 가끔씩 텍사스 홀덤이라는 카드 게임을 한다. 다른 포커 게임들보다 운이 덜 중요하고, 개인의 노력과 계산으로 승패를 바꿀 수 있는 게임이다. 머리 쓰는 걸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딱이다. 게임의 재미를 더하기위해 약간의 돈을 걸고 진행한다. 모여서 술을 적당히 마시고, 자정이 넘으면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이 시작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방금 전까지의 돈독함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서로서로 약 올리고 공격한다. 평소라면 손에 손잡고 함께 걸어갔을 사람들이지만, 어떻게든 밀쳐내고 떨어뜨리고 혼자 살아남으려 한다. 홉스가 탁하고 박수를 칠만한 광경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세상.
진정성도 사라진다. 항상 진심으로 대해주던 형은 선원을 유혹하는 사이렌 같다. 나 역시도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지만, 긴장된 마음을 들킬까 심장이 빠르게 뛴다. 어떤 때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군가 함정에 걸려들길 바라기도 한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누구도 믿지 않아야한다. 믿을건 나 자신뿐.
돈의 지배력도 극도로 커진다. 초조하고 여유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친구는 방금 전까지 기름부자처럼 여유롭던 친구였다. 굽신거리던 동생이 갑자기 통 큰 형님으로 바뀐다. 돈을 따고나면 200원을 아까워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2000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사람으로 바뀌어있다. 역시 돈 많으면 장땡이다.
이런 홀덤 세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높이 평가받는 가치들을 많이 버릴수록 홀덤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협력, 진정성,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경계는 사회에서 추구되어야할 가치로 인식된다. 그러나 홀덤 세상은 정반대의 원리로 세상이 구성된다.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을 잘 속이고, 돈에만 기대어 사는게 최고다.
어느덧 게임이 끝났다. 1등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돈을 벌었다. 뒷정리를 밖으로 나왔다. 새벽 5시 15분. 기분이 좋아서인지 공기가 상쾌하다. 아직 지하철이 안 다니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택시를 불렀다. 룰루랄라 노래를 들으며, 놀면서 돈까지 벌은 자신을 뿌듯해한다. 고개를 돌려 미터기를 봤는데 쉬지 않고 올라간다. 아직 집까지 더 가야하는데. 어어어. 어느덧 택시비는 오늘 딴 돈을 넘어섰다.
홀덤으로 얻은 보상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내가 사는 세상은 홀덤 세상과 다르다는걸 알려주려는걸까.
그런게 아니겠지. 그냥 어지간하면 지하철 타라는 뜻인거 같다. 역시 돈 벌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