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4001-기억을 굴린 죄

머리 속에 저장된 첫 기억은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미국에서 들고 온 짐이 산처럼 쌓여있던 구로1동 아파트 거실. 그 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섯 살 어린아이. 기억의 시작이다. 그 기억 이전의 모습은 사진과 이야기로만 접했다.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 모자를 쓰고 있는 사진, 혹은 영어 한마디도 가르치지 않고 유치원에 보내 놨는데 잘 어울리더라는 어머니의 증언. 그랬던 것 같아라며 어렴풋이 나를 기억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의심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친구들을 만나 기억 조각을 맞추다 보면 내가 들고 있는 조각과 그들이 들고 있는 조각은 참 다르다. 그들이 기억 못 하고 화들짝 놀라는 경우가 많지만, 내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는 조각을 친구가 꺼내놔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몇 년 전 내게서 들은 인생 계획이 인상적이었다는 친구와 밥을 먹었다. 가장 큰 문제라면 나는 그 인생계획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사자가 모르는 인생 계획이라니!

방금 신정아의 책을 읽고 나니 머리가 좀 복잡해진다. 한때 학력 위조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 여파로 여러 유명 인사들이 본인의 학력 위조를 고백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이미 국가대표 거짓말쟁이로 인정받은 사람이 사건 이후에 쓴 글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신선했다.

그녀는 거듭 본인도 피해자다라는 걸 강조한다. 몇 가지 대목에서 코웃음이 났지만, 때로는 처연하기도 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예일대 박사 학위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캔자스대 학부와 MBA 학위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동시에 공부하도록 해준단 말인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이 ‘기억’하는 내용을 자세히 풀어내며 진실함을 호소한다.

그러다 명확히 거짓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넘어서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다. 특히 사회 저명인사들과의 일화를 실명을 거론하며 적어놓은 부분이 그렇다. 전례가 있는 사람이니 모든 것이 거짓이겠지 생각하다가도, 굉장히 구체적으로 적힌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진실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 역시도 ‘기억’나는 대로 적어가고 있다.

문득 내 기억들도 의심 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사오던 첫날, 정말 아파트 거실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을까. 또 자랑처럼 이야기하던 기억들은 정말 사실일까. 조금씩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기억을 조작한다. 그러면 내 기억이 100% 그대로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고 모든 사람이 어느 면에서는 신정아와 비슷한 사람인 걸까. 그녀가 처연해진다. 조작된 기억을 계속 굴려 앞으로 나아가 큰 눈덩이를 만들었던 죄가 참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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