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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세서리 같은 잡지, 모노클

책장에 꼽아만 놔도 기분이 좋아지는 책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지적 허영심, 그러니까 내가 바로 저 책을 읽는 사람이야 라고 뽐낼 수 있는 책이 하나. 그리고 보기에 예쁜 책. 모노클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잡지이다.

모노클을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 편집인인 타일러 브륄레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이다. 한창 “있어빌리티”에 몰두하던 시절,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패션 등을 눈을 확 잡아끄는 세련된 디자인에 끌렸다. 영어 공부를 핑계로 몇 번 구매했지만, 당시 내 영어 실력으로 소화하기에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관심이 시들해졌다.

모노클이 다시 떠오른 건 몇 주 전이었다. 대학교 때부터 알던 동생이 “형은 학교 다닐 때 최신 트렌드도 열심히 찾아보고 그랬잖아”라고 말한 게 계기였다. 요즘의 내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익숙한 것만 하고, 이미 짜 놓은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독서모임을 알아봤고, 모노클을 읽는 모임을 신청했다. 그리고 읽게 된 첫 번째 책은 모노클 잡지가 아니라, 모노클을 연구한 잡지 매거진 B이다.

<매거진 B 모노클>

모노클의 특징이라면 월간지 주제에 굉장히 정성스럽게 아름답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모두가 종이 잡지는 사양산업이라고 외치고 비용절감, 디지털화가 해결책으로 검토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콘텐츠에 더 투자하고, 종이와 디자인 품질을 높여 잡지 자체의 매력을 높이는 접근을 택했다. 2만 원도 안 되는 잡지가 액세서리, 사치품이 된 것이다.

(110쪽)

타일러 브륄레는 각종 인터뷰에서 “종이 잡지를 읽지 않는다면 당신이 뭘 보는지 남이 알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내가 쓰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상대방에게 나라는 사람을 어필하는 것 역시 사치품 장신구의 주된 특징이다.

타일러는 좋은 아이디어나 심지어 글을 잘 팔리게 만드는 게 저널리스트의 기본 자질이라고 강조했다. 예전에 읽었던 <파는 것이 인간이다>가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세일즈”라는 단어는 강요하고, 끈질기고, 속이는 이미지랑 연결시킨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일을 찬찬히 살펴보면 세일즈의 연속이다. 산책 나간 김에 마트에서 계란을 사 와 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하거나, 다른 부서 사람에게 프로젝트 내용을 검토해달라고 하는 것이 세일즈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129쪽)

제 관점은 항상 같습니다. 좋은 저널리스트는 좋은 세일즈맨이라는 거죠. 당신의 이야기를 팔 줄 모른다는 건 마치 사진가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진을 팔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이 아무리 훌륭해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표현할 수 없고, 사람들을 찾아가고 전화를 하면서 그들이 왜 당신의 작업을 봐야 하는지 설득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매달 한 브랜드를 정해서 심도 있게 살펴보는 매거진 B는 모노클과 굉장히 비슷하다. 읽고 버리지 않고 계속 간직할 수 있는 잡지를 만들겠다는 지향점과 디자인에 대한 엄격함이 닮았다. 또한 읽는 사람의 정체성을 많이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저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람일 거다 라는 합리적인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존경하는 인물의 전기를 쓴 작가의 수필 같은 느낌이 든다. 앞으로 모임에서 진짜 모노클 잡지를 풍성하게 읽을 수 있는 배경지식을 쌓은 것 같아서 좋았다.

[책]채식주의자

한 친구는 이 책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용이 이상하다고. 읽으면서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런저런 다양성 영화를 접한 적 없던 시절의 나였다면 역시나 기겁하고 역겨워했을 만했다. 그런 영화들이 도와주었는지, 읽는 내내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과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기억에 남는 건, 그간의 삶과 생활에 어느 순간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가두고 억눌렀던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 다른 삶과 생활을 맹렬히 좇은 영혜와 달리 그녀의 언니는 여전히 스스로를 붙들어 매려 노력한다. 한 번쯤은 ‘피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좇은 영혜의 형부는 과연 마지막까지 후련하고 만족스러웠을까. 주인공과 서술 시점이 달라진 채 엮인 이야기 덩어리들이 참 역동적이다.

이 책을 구입했던 건 맨 부커상 수상 전이었다. 문학에 지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에 내가 손수 골랐을 리는 만무하다. 아마도 잡지나 신문에서 책 소개 글을 보고 나서 구입하지 않았을까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동안 책꽂이에 고이 꽂혀있었다. 상을 수상한 게 작년 5월 경이니, 사놓고 꼬박 1년 가까이를 잠들어있던 것이다.

왜 이제야 읽었나 싶다.

[책]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첫 회사에서 내 이메일 주소는 sh1985.lee@이었다. 이름 이니셜과 출생 연도에 당당한 조합.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한 이 주소를 보고, 같은 부서 대리님이 한마디 했다. 젊으니까 출생 연도를 붙여도 괜찮을 텐데,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고. 틀리지 않았다. 지금 회사의 이메일 주소에는 출생 연도를 넣지 않았다. 점점 ‘젊음’이 나와 어울리는 단어일지 자신이 없어진다.

젊고 잘생긴 도리언 그레이는 그 외모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과 환대를 얻는다. 그는 마법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고, 그의 초상화가 대신 늙어가면서 지은 죄의 흔적까지 모두 짊어지며 변해가는 것이다. 시간이 다르게 변해가는 초상화는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하고 이기심을 부추겨 쾌락을 맛보게 한다. ‘젊음’에 대한 믿음과 방종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둔 초상화를 점점 추악하게 바꿔간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얼굴 인상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유추하는 걸 경계한다. 과거 인상이 안 좋다는 이유로, 또는 인상이 좋다는 이유로 사람을 미워하거나 좋아했다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나중에야 깨달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잘 생기고, 예쁜 사람에 호감이 절로 가는 건 참 막기가 힘들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싶지만 잘 보이지 않기에, 마음의 ‘창’으로서 외모를 본다는 말도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몇 년 전 사진 속 내 모습을 우연히 봤던 며칠 전 기억이 떠올랐다. 별로 달라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모습과 그때 모습에서 명백한 차이가 느껴졌다.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간 젊음을 잃은 건 확실하다. 하지만 내 초상화도 추악하게 변한 걸까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얼마만큼의 젊음이 떠나갔을 때, 아쉬움이 남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쉽사리 구해지는 질문은 아니다.

[책]The Undoing Project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선택함으로써 그 갈증을 해소하려 했다. ‘심리학’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심리학자가 쓴 책’에 관심이 많은 거였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수업도 듣고 책도 많이 읽은 덕분에 용어나 연구자 이름에 대해서는 익숙한 편이었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를 전제로 하는 ‘행동경제학’의 효시가 된 연구를 했다는 다니엘 카네만, 아모스 트버스키 두 사람에 대해서도 익숙했다. 그들이 심리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그들의 핵심이론은 ‘전망 이론’이라는 것인데, 그 이론의 핵심은… 아래 그림을 참고하자.

‘머니볼’, ‘빅 숏’의 작가 마이클 루이스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곧 선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출간일에 킨들에서 검색해봤다. 안타깝게도 킨들 가격은 전. 혀. 저렴하지 않았고, 이럴 거면 그냥 종이책으로 구해야겠다 싶어 주문했다. 다른 책을 읽는 몇 주간 책장에 꽂혀있던 이 책을 꺼내서 첫 장을 펼치던 순간,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는 갈증을 느꼈다.

책에 소개되는 카네만과 트버스키의 한마디 한마디는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통째로 외우고 싶은 내용들이 여러 개라서 사진을 찍어놨다.

“인생에서 큰 결정은 사실 무작위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오히려 작은 결정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선생님을 누굴 만났는지가 어떤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지에 영향을 준다. 누구와 결혼하는지도 인생 그 시점에 주변에 누가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에 작은 결정은 아주 체계적으로 이뤄진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소름끼치게 정확한 이야기다. 무작위로 연결된 인생의 여러 줄기 중에서도 나를 나답게 만들고, 잘 대변해주는건 매일매일 하는 사소한 결정들이다. 예를 들면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려 하고, 가급적이면 집에 일찍 들어오려는 습관 등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은 ‘어떤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지 않고, 어떤 것에 관한 ‘설명’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

같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설명하냐에 따라 선택이 많이 달라진다. 축수선수 박지성은 ‘장점이 뚜렷하지 않은’이라고 묘사될 수도 있지만, ‘멀티플레이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부족한 언어 능력 탓에 적합한 문장으로 옮길 수 없지만, 이외에도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유용한 정보와 지적 자극을 주는 데에만 그치는 책이 절대 아니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 실망, 아쉬움, 고마움, 행복함 등이 책을 환하게 만들었다가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의 마지막이 묘사된 대목에서, 나는 그야말로 심장이 털썩 주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책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쉽게 술술 읽혔던 초반부와 비교했을 때, 연구 내용이나 동료 교수와의 논박이 주를 이룬 중반부에서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야기, 두 사람이 그렇게 경계하고, 트버스키가 특히나 혐오하던 바로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매우 매혹적이다. 정말 매우 매혹적이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마무리까지.

[책]안나 카레니나

한 가지 사실에 기초해 다른 내용을 어림짐작해보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내내 러시아어를 배웠고,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노문과 수업을 들었다고 이야기하고 나면 정체성이 덧 씌워진다. 러시아어를 한번 해보라는 주문이 쏟아지고, 러시아를 가봤거나 적어도 러시아 문학을 읽어봤을 것이라는 기대가 난무한다.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고백컨데 나는 러시아 문학을 즐기지 않았다.

방금 ‘안나 카레니나’를 드디어 다 읽었다. 작년 여름부터 읽기 시작했고, 책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탁월성에 머리가 주뼛주뼛 서거나 가슴이 흔들렸던 걸 감안하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중간중간 다음 장을 넘길 의욕을 잃은 채, 다른 책으로 잠깐 외도했다가 다시 돌아와 등장인물 관계를 어렴풋이 떠올리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이름과 성과 ‘애칭’을 넘나들며 인물을 등장시키는 현란함에 정신을 잃은 적도 많았다. 러시아 사회와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찬 대목에서는 아득함을 느꼈었다. 분명 러시아어가 아닌 한국어를 읽고 있지만, 문장만 두둥실 떠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과 평생 함께 하고 싶다. 사람 심리를 이토록 섬세하고 정밀하게 들춰내고, 변화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책은 처음이었다. 한국어 문장을 읽으면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데, 러시아어 원문은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하다. 행복한 다른 인생을 꿈꿨지만, 카레니나(카레닌 가의 사람)로 남을 수밖에 없던 안나. 그녀의 처절한 죽음이 가슴 시리다.

[책]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지금 누리거나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건지 생각해본 적이 많지 않다. 서울 내 북촌 혹은 서촌 등 한옥들이 모여있는 곳을 즐기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지어진 한옥들이 보존된 채 남아있는 지역이라고만 단순히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정세권이라는 인물에 대한 입체적으로 조망하며 일제시대를 알려준다. 그 당시에도 파이낸싱까지 해결하는 부동산 디벨로퍼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독립운동까지 적극 지원하는 정세권의 삶의 궤적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다. 명확한 비전과 실행력, ‘개밥 먹기’를 주저하지 않는 꼼꼼함, 그리고 열정 모든 게 인상적이다.

정세권을 인터뷰했다는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는가’ 지면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것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렵지 않고 술술 넘기며 읽고 난 뒤에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것은 과거 누군가에게 진 부채라는 걸 말이다.

[책]가만한 당신

가만한 당신.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책을 덮고 나자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라는 표현은 많이 사용하는데, 가만’한’이라는 형용사는 낯설었다. 부랴부랴 사전을 찾아보니 뜻이 나왔다.

가만한: [주로 ‘가만한’의 꼴로 쓰여](움직임이)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

역설적인 제목이다. 책에 소개된 서른다섯 명은 결코 가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인권, 성범죄, 질병, 환경 등 영역에서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소개되어있다. 저자는 어떤 의도로 이런 제목을 선택했을까.
깨달았다.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지만, 알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지 탓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던 ‘가만한’ 사람들이 맞았다.

서른다섯 명의 활동 영역이 크게 몇 가지로 추려져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반복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또렷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애잔한 마음이 차올랐다.

[책] Competing Against Luck (혁신은 운이 아니다)

만약 그동안 읽은 책 중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뽑으라고 한다면 그중 하나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How Will You Measure Your Life‘일 거다. 사려 깊은 시각과 통찰력 넘치는 분석을 전해주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런 그가 새 책 ‘Competing Against Luck: The Story of Innovation and Customer Choice‘을 썼다는 걸 우연히 알자마자 주저 없이 구입했다. 몇 주 정도 시간을 들여 다 읽은 게 작년 11월 말. 원래 계획은 감상을 정리해 기사로 쓰려던 거였다. 그러나 논의 끝에 블로그에 좀 더 적합한 내용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조금만 더 다듬어 올려야겠다고 한지 벌써 2개월이 되어간다. 마침 구정 연휴를 맞이해 드디어 묵혀두었던 글을 마무리해보련다.

 

여기 많은 주목을 받는 스타트업이 있다. 창업자 본인이 경험했던 불편함을 해결해주자는 목표로 회사를 만들어 성공적인 출발을 거두었다. 힘을 받아 더 열심히 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반응이 시원치 않다. 결국 초기 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조용히 문을 닫게 된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례이다. 많은 기업들이 혁신을 목표로 조직을 만들고, 예산을 쏟아붓고, 치열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정작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극히 드물다. 그래서인지 혁신은 예측 가능한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운이 지배하는 개념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혁신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해결과제(jobs to be done)’ 개념에 주목한다. 고객은 어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기에 맞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고용한다. 해결과제에 성공한 기업은 ‘구글링 하다’, ‘우버를 타다’, ‘네이버에 물어보다’처럼 동사로 불리기도 한다. 반면에 해결과제에 실패한 기업은 해고당한다. 고용과 해고의 개념을 회사와 직원의 관계에서만 생각해왔는데, 이를 고객과 회사에 관점으로 확장해보니 직관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해결과제란 무엇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밀크셰이크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어떤 패스트푸드 업체에서 밀크셰이크 매출을 높이고 싶어 했다. 통상적으로 고객의 성별, 연령 등을 분석하고, 경쟁제품은 어떠한지 분석해 방안을 내놓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구매 이유를 면밀히 분석해보니, 절반 이상은 운전하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1~2시간 운전 중 적당히 배부르면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기에 밀크셰이크를 구매한다는 게 밝혀졌다. 또 저녁 시간대 매출이 높기에 이유를 분석해보았다. 저녁을 먹으러 온 고객의 자녀가 밀크셰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좋은 부모가 돼보자는 마음에서 구입한다는 걸 발견했다.

밀크셰이크는 완전히 다른 맥락(출근길 운전 중, 퇴근 후 자녀와 함께 저녁식사)에서 각각의 과제(간편하게 공복감 해결, 좋은 부모 되기)를 해결해주고 있었다. 이 분석에 의거한 매출 증대 방안은 식감을 높일 수 있는 시리얼 같은 첨가물 옵션을 제공한다든가, 혹은 아이들이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양을 판매한다든가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해결과제를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구직활동에서 기업이 원하는 자격 요건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 것처럼, 고객의 해결과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해결과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고객이 경험하는 모든 요소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자기 자신이 느낀 불편함은 무엇이고,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것만큼 좋은 시작점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관련해서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는 사람을 분석해보는 것도 좋다.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는다는 건 그 무엇도 고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에, 인사이트를 얻기에도 좋을뿐더러 나아가 훌륭한 잠재고객이다.

그렇게 파악한 채용조건에 맞는 종합적인 경험을 만들고 전달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 회사는 고객이 1cm짜리 ‘구멍’을 원하는데 반해, 1cm짜리 ‘드릴’, 즉 제품이나 서비스로 접근하는 실수를 범한다. 또 해결과제를 중심으로 회사의 프로세스가 구성되어야, 지속적인 혁신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 회사들은 이와는 반대로 사업팀, 제품개발팀, 기획팀 등 기능적으로 나눠져 있다. 회사에서 목표로 하는 해결과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조직 구성원이 이를 인식하고 여기에 맞도록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미션이나 목표가 필요하고, 조직 구성원들이 거기에 입각해 자율적으로 의사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이양해야 한다.

필자가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늘 미심쩍게 생각하던 부분이 있다. 경영학에서 활용하는 사례연구를 보면 이 사례에서는 이렇고, 저 사례에서는 저렇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게 너무 많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론이 과연 어떤 효용성을 가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크리스텐슨 교수는 확률을 높여줄 수 있는 건 좋은 이론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고객의 문제를 잘 해결해주면 혁신에 성공한다는 인과관계보다 더 명쾌한 건 없다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게다가 회사와 업무를 뛰어넘어 아주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배우자가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가 나를 보자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 적용 가능한 상황이 무궁무진하다.

아직 한국어판은 출간되지 않았지만, 영어판의 문장이나 단어가 어렵지 않다.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올해, 아니 인생의 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책]지금 다시, 헌법

‘법’은 내게 항상 딱딱하고, 어색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대학교 전공 수업 중에도 법 관련된 수업이 여럿 있었지만, 유독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부끄럽게도 대학교 4년 내내 법만큼은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졸업하게 되었다. 어떤 주제가 나오더라도 한마디 정도는 거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법에 대해서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내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지나가던 어느 날, 이 책을 주문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둘러보러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는데, 열심히 광고 중이던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요즘에 비분강개하고 있던 나였다. 궁금해졌다. 과연 대한민국의 기초가 된다는 헌법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말이다. ‘지금, 다시 헌법’은 태어나서 처음 읽는 법 관련 책의 영예(?)를 꿰찼다.

헌법 구절 하나하나를 적어두고, 다소 무미건조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는 책에서 감동과 환희를 느꼈다면 거짓말일 거다. 맞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근거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어떤 여정을 지나 거기에 이르렀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꽤나 깊은 여운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작금의 시국이 헌법에서 설명하는 가치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부가적으로는 한 나라의 헌법을 정한 사람도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을 수 있구나라는 안도감까지!

[책]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하면, 그 사람의 가족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다. 그리고 힘을 모아 외친다,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변의 관심을 촉구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수 클리볼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녀의 목을 졸랐지만, 슬픔을 드러낼 수 없었다. 살인자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더없이 사랑스럽고 천사 같던 아들이 바로 그 악마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아들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라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지푸라기를 찾아보지만, 점점 잡을 수 있는 게 사라진다. 그 천사가 그 악마였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접는다. 아들이 악마로 변해갈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목 조른다.

이 책을 꾸역꾸역 완성해내면서 셀 수 없이 소리 죽여 울었을 그녀의 용기에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낸다. 내가 읽어본 책 중 이렇게 저자의 피눈물이 스며든 책은 없었다.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이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용서받기 어려운 아들의 삶을 이렇게 저렇게 계산해보며 피눈물 가득한 책으로 꿰매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