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독서

[책]4001-기억을 굴린 죄

머리 속에 저장된 첫 기억은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미국에서 들고 온 짐이 산처럼 쌓여있던 구로1동 아파트 거실. 그 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섯 살 어린아이. 기억의 시작이다. 그 기억 이전의 모습은 사진과 이야기로만 접했다.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 모자를 쓰고 있는 사진, 혹은 영어 한마디도 가르치지 않고 유치원에 보내 놨는데 잘 어울리더라는 어머니의 증언. 그랬던 것 같아라며 어렴풋이 나를 기억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의심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친구들을 만나 기억 조각을 맞추다 보면 내가 들고 있는 조각과 그들이 들고 있는 조각은 참 다르다. 그들이 기억 못 하고 화들짝 놀라는 경우가 많지만, 내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는 조각을 친구가 꺼내놔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몇 년 전 내게서 들은 인생 계획이 인상적이었다는 친구와 밥을 먹었다. 가장 큰 문제라면 나는 그 인생계획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사자가 모르는 인생 계획이라니!

방금 신정아의 책을 읽고 나니 머리가 좀 복잡해진다. 한때 학력 위조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그 여파로 여러 유명 인사들이 본인의 학력 위조를 고백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이미 국가대표 거짓말쟁이로 인정받은 사람이 사건 이후에 쓴 글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신선했다.

그녀는 거듭 본인도 피해자다라는 걸 강조한다. 몇 가지 대목에서 코웃음이 났지만, 때로는 처연하기도 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예일대 박사 학위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캔자스대 학부와 MBA 학위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동시에 공부하도록 해준단 말인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이 ‘기억’하는 내용을 자세히 풀어내며 진실함을 호소한다.

그러다 명확히 거짓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넘어서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다. 특히 사회 저명인사들과의 일화를 실명을 거론하며 적어놓은 부분이 그렇다. 전례가 있는 사람이니 모든 것이 거짓이겠지 생각하다가도, 굉장히 구체적으로 적힌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진실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 역시도 ‘기억’나는 대로 적어가고 있다.

문득 내 기억들도 의심 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사오던 첫날, 정말 아파트 거실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을까. 또 자랑처럼 이야기하던 기억들은 정말 사실일까. 조금씩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기억을 조작한다. 그러면 내 기억이 100% 그대로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고 모든 사람이 어느 면에서는 신정아와 비슷한 사람인 걸까. 그녀가 처연해진다. 조작된 기억을 계속 굴려 앞으로 나아가 큰 눈덩이를 만들었던 죄가 참 무겁다.

[책] 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

요즘 업무와 관련해서 조직의 프로세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프로세스라고 하면 사뭇 딱딱하게 들리지만, 어떻게 하면 조직 구성원이 잘 협업하고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엇인가를 하는 공통의 규칙이다. 조직의 문화와 가치관에 기반해 규칙이 정해지고, 문화와 가치관이 변할 때마다 규칙은 변하게 된다. 전에 다니던 회사는 프로세스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립하는걸 좋아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런 만큼 안에 있는 나로서는 답답하고 움츠러들 때가 많았다. 자그마한 걸 하나 하려고 할 때도 프로세스를 지켜야 했기에, 다른 부서를 설득하고 예산을 승인받아야 했다.

작은 회사로 옮기면서 품었던 몇 가지 기대 중에는 답답한 프로세스 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겠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프로세스가 없다 보니 생기는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프로세스가 없다는 건, 사람들 사이의 공통적인 규칙이 없다는 뜻이다. 규칙이 없기 때문에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생겼고, 혼란이 생기다 보니 일이 진척이 안된다. 게다가 점점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 혼란은 더 가중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저변에는 문화와 가치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점점 다다르고 있다.

구글의 최고 인사 담당자가 이야기하는 그들의 인사제도와 바탕에 깔린 철학을 접하면서 이 회사는 정말로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굉장히 분석적이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적은 인원을 대상으로 프로토타이핑을 해본다. 구글은 모든 것을 수치로 측정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인사관리마저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공개된 자신들의 노하우를 다른 회사들이 베끼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고. 갖고 싶으면 가져가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는 아마도 껍데기만 벗겨서는 절대 성공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사관리로 가장 유명한 회사의 신입사원 채용 인적성 문제를 출제하기 위해 합숙하던 때, 사실 굉장한 실망감에 빠졌었다. 이 문제를 하나 더 푼다고 그 사람이 더 뛰어나 다는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실망감이었다. 나 역시도 동일한 문제를 풀어낸 덕분에 입사했겠지만, 좀 더 근사한 무엇인가가 근간에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경력 20년이 넘는 인사 담당자의 인터뷰도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면접장 들어오는 걸음걸이만 봐도 안다니! 책에도 나온다. 착각 중에 그런 착각도 없다고 말이다.

한동안 경영이나 기업 관련 책을 의식적으로 멀리하다 읽은 책이라 그런지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문화는 아침으로 전략을 먹는다”라는 번역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 안 되지만.

[책] 불편해도 괜찮아

내 경우는 그렇다.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해야만 할 때, 책이 가장 그리워진다. 책이 그리워질 때면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주문한다. 금방이라도 전부 읽어버릴 듯한 기세로 말이다.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며 김두식 교수에 대한 좋은 느낌이 생겼다. 그 좋은 느낌이 “불편해도 괜찮아”를 결제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영화를 사례로 살펴보는 인권 이야기라니, 읽고 나면 교양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만 꼽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중 하나를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 시기, 그 환경,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소설과 비슷한 경험이지만,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영화의 경험은 소설의 그것보다 강렬하다. 해볼 수 없던 경험을 짧고 굵게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짧고 굵은 새로운 경험이라는 건, 영화가 뿌리를 두고 있는 관점과 세계관을 빠르게 수용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가 편견과 왜곡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반복적으로 투영된다면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빠지게 된다.

“300”을 인용해 장애인 인권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페르시아인이 흉측한 괴물로 묘사된 점에 대해 계속 불편한 감정이었던 건 기억난다. 하지만 신체 건강하지 않은 아기는 버리는 스파르타인이나 장애인으로 묘사된 스파이에 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었다. 아니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평소 장애인을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왔던 시간들에 한방 펀치를 날렸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인권이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겁하는 것이라고. 간단한 명제이지만 쉽지 않은 명제이기도 하다. 늘 따르고 싶지만, 좌절하는 명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과연 인권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깊은 의문과 불확실성을 남긴 채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책]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진정성(authenticity)의 정확한 실체는 모르지만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으며 ‘진정성’이 뭐든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원한다.”

‘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라는 기치 하에 몇 가지 책을 골랐다. 얼마 전까지 나도 부르짖고,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던 ‘진정성’. 실체가 없고 그럴듯한 껍데기로 둘러싸인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중반 이후 내용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철학, 정치사회학 개념들이 등장하다 보니 눈이 잘 가지 않았다며 변명해본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줄곧 강조되던 개념, 즉 진정성이라는 게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정의가 쉬워 보이는 미술품의 진정성, 청바지의 정통성, 전통문화의 고유성 또한 이 문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수제 XX’, ‘유기농 XX’, ‘100% 자연의 XX’, ’30년 전통의 XX’ 등 일반적으로 진정성과 연결되는 개념들은 마케팅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모으고 설득할 목적이 없다면 진정성 운운할 필요도 많이 사라진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에요”라며 당사자가 원치 않는 애정 공세를 퍼붓는 경우도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 결국은 ‘나와 만나줘’라는 목적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얼핏 들었을 때 좋게만 들리는 개념이 허울 좋은 개념이라는 걸 알게 해 준 좋은 책이었다. 좀 더 깊이를 갖춘 이해를 위해 나중에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이다.

[책] 이기적 섹스

어느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딸에게 통금을 적용하는 부모님께 외쳤었다. 어머니가 상상하는 그거, 낮에도 할 수 있다고. 가끔 딸이 남자친구랑 여행 간다고 하면 환하게 웃으며 피임은 꼭 하라고 말한다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우리나라는 성, 특히 여성의 성에 대해 보수적이다. 여자친구랑 여행 간다는 아들을 보며 정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눈빛을 보내는 우리 부모님 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다.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한 남자는 그 사실을 떠벌리며 어깨를 으쓱하지만, 여러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한 여자는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남자를 칭하는 용어는 없지만, 그런 여자를 칭하는 용어는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하나가 아니다. 이상하지 않은가. 섹스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둘이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최근 나의 화두인 스스로를 인정하기, 일환으로 자신의 욕망을 인정해보자는 생각 중에 그럼 여자의 적나라한 욕망은 어떤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이 책을 구입했다. 섹스 그 자체가 정말 좋고, 자기는 그런 사실에 부끄럼이 없다는 저자. 그러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섹스 사랑을 입이 마르도록 외치지만, 저자도 결국 남자들에게 대놓고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용기 내어 책으로 옮긴 거다.

주제가 섹스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그와 연관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데이트-공식적 연인관계 확인-손잡기-키스-섹스의 과정이 일반적이지만, 브라질이나 독일에서는 연인관계 확인 전 섹스가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문화에서 정한 규범에 따라 차이가 존재한다. 하긴 이상할게 전혀 없는 게 뭐가 되었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되는 게 아닌가.

아직까지 나에게 섹스는 스쳐가는 사람이 아닌 결혼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과만 허락된 행위이다. 그리고 사랑은 신뢰와 연결되는 개념이기에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저자가 밝힌 연애 중이면서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갖는 건 내키지 않는다. 물론 내키지 않는다가 상상해본 적 없다와 연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문화와 규범이 바뀌지 않는 한은 내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다.

[책] 욕망해도 괜찮아

“저 역시 욕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끝없이 통제하는 문화 속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욕망을 잘 통제하는 사람만이 성공적인 학교, 직장, 가정,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른다는 것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방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어두고 반복하여 자물쇠를 채워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자물쇠로 채워놓은 욕망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언젠가는 반드시 치명적 역습에 나섭니다.”

예전 여자친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를 평한 적이 있다. 오빠는 수도승 같다고. 유혹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때인 거 같다. 그 친구의 목소리는 감정을 드러내듯 상당히 날카로웠는데,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심 좋아했었다. 왜냐하면 자극과 유혹에 대한 반응을 통제하고, 정진하는 것이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모범생, 착한 아들이라는 잣대로 나를 옭아매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 기준에서 자유분방한-적절한 표현인지 확실할 순 없지만-생활을 하면서 성취는 비슷하게 이뤄내는 사람들을 볼 때면 부러움과 시기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부러움과 시기심에 대한 반작용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자신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최근 몇 주간 아주 빠른 속도로 휘몰아치던 감정의 소용돌이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우연히 만난 이 책 저자의 모습은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모범생,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 차 있다는 점)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책에서 선을 넘는다고 표현했던 사건, 스스로 쳐놓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도 아닌 그 경계를 조금씩 넘을 때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인식이 풍요로워짐을 느꼈다. 선을 넘는다고 악마가 득실거리고 삐뚤어진 삶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경계 저 편에는 사파의 세계가 존재하겠지만, 걱정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책을 덮고 내린 결론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계속해서 경계를 넓혀가며 일종의 실험을 계속해야겠다. 그래야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고, 내 삶이 풍성 해질 테니까.

[책]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언제부터였을까. 책을 구매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며, 책 읽기를 의식적으로 멀리하며 지낸다. 그러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 주말 하루를 꼬박 고민과 탐구로 보내고는,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책을 찾아 산책 겸 동네 교보문고로 향한다. 그러고는 여러 권을 한꺼번에 사와 몰아서 읽는 게 요즘의 책 구매 행태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한 가지 주제나 분야에 대해 여러 권을 몰아서 읽는 구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내가 고민하던 주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책이지만 말이다.
독서법을 강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여러 책을 살펴봤지만, 마음에 드는 책이 없어 직접 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저자의 동기가 호기롭다.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뇌과학, 인지심리학 등을 동원해 나름 탄탄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읽다 보면 마치 심리학 서적을 읽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니까 말이다.
심리학에 관심이 많고, 알지 못하지만 부전공까지 했던 사람으로서 약간의 미심쩍음을 감출 수는 없다. 책에서 소개한 여러 사례나 이론들은 맥락을 난도질당한 채 배치되어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나 만족스러운 책이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동기를 가득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뇌는 끊임없이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독서가 변화시킬 나를 기대하며 의지를 다진다.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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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랬다는 것을 몰랐다. 스스로를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늘 경계하고, 세상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사전에 조심하며, 기본적으로 아주 자주 성폭력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세계 최고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유명 정치인들 중에 강간을 옹호하는 헛소리를 숱하게 내뱉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집에 가는 길이 무섭다고 함께 가달라는 이야기가 투정만은 아니었던 거다.

이 책의 저자는 ‘맨스플레인(mansplain: man+explain)’ 이라는 신조어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남자들이 무턱대고 여자들에게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는 “이 오빠가 설명해줄게” 정도로 번역하자는 의견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받는 불합리한 차별에 관한 사례를 모아놓았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전 사회적인 담론으로 이를 확장시키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쉽게 읽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꾸역꾸역 읽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기보다 무거워진다.

평소에도 여러 가지 악조건 때문에 우리나라는 여자가 살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을 해왔다.(그렇다고 남자가 살기 쉬운 곳은 아니다) 다른 이의 외모에 대해 전혀 아무렇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하고, 여성에게 불리한 성역할 관념이 강한 게 우리나라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는 더 신경 쓰고 조심해왔다고 자부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인식하지 못하던 지난 과오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최근 영화 ‘암살’이 인기를 얻으면서,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분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고 한다. 전지현이 열연한 안옥윤이라는 인물 같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성들이 상당수 존재하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에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성은 대체로 한 가지 유형으로 모아진다. 미모와 매력으로 그 시대 권력자들의 마음을 샀던 이들의 이름이 가장 많이 보인다. 이렇게 제한된 영역에서 눈에 보이지 않거나 혹은 보이는 장벽에 가로막힌 여성들의 사례를 줄여나가는 건 비단 한쪽 성의 과업이 아니라, 모두의 과업으로 존재해야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많이 느꼈을 거라는 걸 알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세상이 곱게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데려다주긴 귀찮으니, 그냥 함께 사는 건 어떠냐고 물어봐야겠다. 다음에는.

[책] 인테리어 원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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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선배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져있고, 군데군데 빨간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선배의 원룸은 매우 깔끔해보였다. 특히 시선을 잡아끌었던 건 벽시계였다. 흰색, 검은색 바탕에 빨강색 원이 시간을 표시하는 멋들어진 벽시계였다.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니 현대카드 모마샵(MoMA)에서 샀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 시계 사려고 현대카드를 만들었다고. 순간 겉으로는 태연지만, 속으로는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저렇게까지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는걸까.

작년 초 잊지못할 조직 개편으로 인해 사무실이 수원으로 옮겨졌다. 매일같이 자정 넘어서 퇴근했기에 출퇴근이 정말 괴로웠고, 결국 회사 근처에 원룸을 구해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8평 정도 되는 작은 원룸이었지만, 역사적이었던 독립 생활의 시작. 그전까지는 별 관심도 없었던 인테리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나는, 도쿄 출장 중에 들렀던 무지(MUJI) 매장에서 본 인테리어들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이미 내 방의 컨셉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무지스타일.

최대한 저렴하게 무지 느낌을 내려고 동네 이마트 자주(JAJU) 매장을 들락날락하며 소품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에서 유로 방을 꾸미는건 처음이다보니 어떤 소품을 사야할지 감이 잘 안 왔다. 그리고 소품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원래부터 방에 있던 것들이 신경을 긁었다. 특히 마지막까지 나를 가장 괴롭혔던건 꽃무늬 벽지. 뜯어버리고 흰 벽지로 바꿀까 몇번을 고민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께서 아들내미 걱정하는 마음에 사오신 이런저런 소품을(내가 세웠던 방 컨셉과는 맞지 않는)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망가졌다. 특히 화장실 슬리퍼와 휴지통이 못 생겨서 싫었다.

만약 그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내 마음에 드는 방으로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일단 예시들이 거의 다 내 스타일이다. 소파며 의자며 타일이며 정말 마음에 든다. 그리고 허황된 상상을 현실로 구체화시켜놨다. 나같은 인테리어 초보자들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부터 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좋고, 어느정도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세한 살아있는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좋다. 한마디로 완벽한 실용서. 혼자 힘으로 저렴한 가격에 효과적인 인테리어를 할 수 있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내 꿈 중에 하나는 나만의 집을 갖는 것이다. 결혼 후 꾸릴 가족의 삶에 딱 맞춰진 집. 대량생산된 공간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와 가족의 손길이 닿아있고, 함께 나이 들어갈 집을 만드는게 내 꿈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꿈이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꼭 처음부터 집을 지을 필요 없이, 이미 만들어진 공간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나만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탄생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진다.

하지만 아직 풀어야할 숙제가 많다. 뭐가 되든간에 내 집이 있어야한다. 과연 내 집을 언제쯤이면 갖게 될까. 서울 집값은 왜 이렇게 비쌀까. 우리의 핵심 목표는 언젠가 내 집을 갖게될 것이라는 생각을 정신차리고 하다보면 내집 인테리어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인테리어해야한다고 생각이든다.

[책] 트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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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결핍된 것 같은 결혼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두 사람 자체와 관계보다 주변 환경이나 물질적인 요소가 부각되는 결혼은 술자리 안주로 자주 등장한다. 이런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왠지 헛웃음이 나오거나 씁쓸함을 입안에 머금는다. 반면에 아름답고 가슴 벅차게 하는 이야기를 가진 두 사람의 결혼을 마주할 때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사랑을 매개로 한 결혼이 20세기에서나 생겨난 개념이라는걸 머리는 알고 있지만, 나는 20세기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시작은 사랑이 충만했으나, 어느순간 사랑이 증발해버리는 결혼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은 신뢰와 의리로 바뀐다지만, 나비가 되지 못하는 번데기처럼, 번데기인채 굳어버리는 사랑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선택지는 크게 두가지이다. 결혼을 취소하거나, 아니면 같이 사는 번데기를 애써 외면한로 살거나. 두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기준을 아주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결국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게 더 이득인지, 아니면 종식시키는게 이득인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변 시선을 고려하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게 여러모로 더 낫다. 결혼 생활을 종식시키는, 공식적인 언어로 “이혼”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아직까지는 피곤한 행위이다. 원치않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니까.

하지만 결혼을 안 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것인지, 못 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결혼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해야하는 인륜지대사로 여겨지며, 중학교 때 배운 대우 관계에 의해서 인륜지대사를 겪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닌게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결혼은 사랑이 없어야만 하는 결혼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계약 기간 하에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희원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그 사람과의 인연은 완전히 묻어버린채 새로운 다른 계약을 기다려야한다. 몇년의 근무기간이 지나면서 희원에게 남은 건 사랑에 대한 불신 뿐이다.

이 회사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요 고객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다. 성적 정체성을 감추려고 결혼하는 동성애자, 이혼에 대한 사회적 대가를 경험하고 잠시 피해있으려고 하는 돌싱, 아니면 결혼 생각은 없지만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결혼한 사람. 결국 자신을 가려줄 가면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결혼 생활의 본질적 가치 보다는, 부차적인 가치에 더 매달리는 사람이다.

책을 읽다보니 결혼이라는거 자체에 대해서 커다란 기대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누구랑 결혼하냐보다는 어떻게 결혼 생활하냐가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내 생각의 범위는 결혼 생활 자체까지 뻗어나가지 않고, 누구를 만나야하는지에서 멈춰져 있는 것일까. 누구를 만나게될지 아직 명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누구일지 모르는 미래의 내 배우자가 나중에 이 글을 읽는다면 이렇게 물어보겠지.

“그래서 당신은 나를 사랑해서 결혼한거야?”

“사랑하니까 결혼했고, 결혼했으니까 사랑해야지”

이렇게 대답하면 좋아할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