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짧은생각

김민희가 상을 받다

5년 전 가장 싫어하는 배우가 누구냐고 물어봤으면 아마도 그녀의 이름을 이야기했을 거다. 힘없고, 바보 같아 보이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연기를 정말 못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연애의 온도’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가 주연이라는 사실에 별 기대 없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몰입하고, 보는 동안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그녀의 이름이 들어간 영화는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보게 되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도 실망시키지 않았고, ‘아가씨’에서는 연기도 연기지만, 왕년 모델 출신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녀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프로야구팬들은 불가능한 일을 묘사할 때 ‘이대호 도루하는 소리’라고 한다. 몇 년 전이었다면 이대호 도루하는 소리로 생각했을 법한 일이 벌어졌다. 정확히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하고, 성장시켰는지 오롯이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굉장한 노력이 수반되었을 거라 짐작만 한다. 비록 사생활에 대한 잡음은 더 심해지겠지만, 나는 그녀의 이 어마어마한 성취에 힘차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에 대한 내 판단,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

사랑, 발전이라곤 없는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익숙해지는 게 진리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대저 편안해지거나 실력이 좋아지거나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내 경우에도 대부분이 그렇다.

사랑, 그 하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서른을 훌쩍 넘기고, 인생의 삼분 지일 정도는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나는 사랑이 너무나 어렵다. 주변에는 결혼하고 애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 아니 동생들이 그득해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이 너무나 어렵다. 게다가 옛날과 비교했을 때, 나아진 점이 없다는 사실이 좌절감을 더 키운다.

내 대부분은 이전보다 나아지고 발전하는듯한 느낌이라도 든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그렇지 않다.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사랑, 그 하나만큼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변치 않는 사랑은 환영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사랑은 단호히 피하고 싶다.

강남역 돼지고기집

​’인연’이라는 개념을 대체로 믿지 않는 편이지만, 때때로 정말 그런 건가 생각하는 때가 있다. 오늘 저녁 또한 그랬다.

몇 년 전 쓰다만 노트에 일기를 쓰려던 어젯밤, 예전 일기를 몇 장 읽어보았다. 한창 운동 열심히 하던 시절 피트니스 트레이나 샘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PT가 따로 없던 회사 피트니스에서 거의 PT 선생님처럼 챙겨주던 소중한 분이었다. 틈날 때마다 해주던 운동에 관한 조언은 곱씹어 보면 인생에 적용할만한 조언이었다.

강남역 근처에서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맞은편에 새로운 무리가 앉았는데 어째 낯이 익었다. 그 트레이나 샘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2년 만이었다. 짧게 서로 근황을 공유하고, 조만간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인연’을 다시 생각해보는 밤이다.

레이디 가가의 쇼에 머리를 조아리다

규칙도 어려워하고 팀 이름도 거의 모르는 미식축구이지만 딱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있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가 유명하다는 사실 말이다. 어제가 바로 그 슈퍼볼 날이었고, 하프타임 쇼는 레이디 가가가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알려진 건 드론까지 준비된 공연이라는 소식 정도였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에 공개된 공연을 퇴근하고 나서 저녁에야 볼 수 있었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놀랍다는 언급이 오고 가던걸 스치듯 본터라 기대가 되었다. 정말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무대였다. (사전에 촬영되었다고 하지만) 수백 대의 드론이 하늘 위에서 움직이며 그녀를 지원 사격하고, 줄을 타고 땅에 내려온 그녀는 쉴 틈 없이 움직여댔다.

그러면서 히트곡들이 스쳐 지나갔다. 신박한 무대 연출과 함께 ‘Just dance’와 ‘Poker face’를 들으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무려 8년 전 노래였다. 유럽여행 중 들른 암스테르담 운하에서 볼륨을 한껏 높여 이 노래를 틀어놓고 소리 지르던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대략 5가지 정도 테마의 짜임새 있는 무대가 쉴 틈 없이 전개되더니 공연이 끝났다. 마무리 또한 “난 이제 할거 다 했다”라는 느낌을 주며 끝났다.

몇 년 전 레이디 가가에 대한 내 인식은 일부러 특이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가수 정도였다. 고기로 옷을 만들어 입고, 기이한 행색이 그런 인식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제 무대에서 그녀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예술가로 느껴졌다. 솔직히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년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누가 준비할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스트레스 많이 받으리라 짐작된다.

내 안에 순실이 있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친구의 동생을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그의 근황이 내심 궁금했었다. 나는 주변 부대에 먹을 것, 입을 것 등의 물품을 보급해주는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다. 친구 동생이 같은 사단 신병교육부대에 훈련병 조교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교 물품 보급을 담당하던 후임에게 그를 특별히 챙겨주라고 일러두었고, 따로 만나서 간식을 사주기도 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와 악수하고, 흐뭇하게 그때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때였다. 나는 세금으로 마련된 군대 물품을 사사로이 유용한 거였다는 걸 깨달은 게 말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더 큰 일들이 있었다. 간식이나 과일을 다른 부대에 나눠줄 때, 조금씩 빼돌려 후임들과 나눠먹은 적도 꽤 많았다. 양말 빨래가 귀찮아 창고에서 새 양말을 꺼내오거나 간부용 전투화를 하나씩 챙겨 휴가 갈 때 신곤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부대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만큼은 굉장히 풍요로웠다. 가끔씩 다른 부대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저렇게 지내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죄책감이 없었다. 나는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고, 우리 부대는 물품을 담당하는 부서이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간부들이 납품업체에 일종의 상납을 받는 광경을 목격할 때면, 그들을 욕하기 바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 행동들도 큰 틀에서 보면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사로운 관계를 챙기려 부조리를 지시하고, 편하게 지내려고 세금으로 마련된 물품을 유용했다.

물론 군대라는 특수성을 감안해볼 때, 이 사실에 대해 손가락질하며 크게 욕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본다. 젊음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군대에 대한 나름의 통쾌한 복수였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공무원, 정치인, 기업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액과 규모가 차이 나긴 하지만 말이다.

내 안에 순실이 있다. 손가락질하며 욕하던 사람처럼 되지 않으려면 항상 조심해야겠다.

손 닿을 거리에 휴대폰이 없다면

이번 연휴가 시작되면서 한 가지를 결심했다. 휴대폰 만지작거리는 시간을 최소화하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하루가 시작되면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놨다. 나는 책상 앞에 주로 앉아있고, 침대와는 세발자국 가량 떨어진 거리이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 먹을 때쯤에만 휴대폰을 잠깐씩 사용했다. 그러자 모든 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런 패턴이었다. 책을 읽거나 생각하던 중 퍼뜩 궁금한 내용이나 메모할 내용이 떠오른다. 책상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든다. 잠금화면을 풀고 나서 삼천포로 빠지기 일수였다. 웹사이트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내려놓고 뭘 하려고 했었던 건지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이번 연휴처럼 휴대폰을 곧바로 집어 들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메모지를 꺼내 나중에 찾아볼 내용을 적어놓는다. 그리고 하던 일에 집중하며 몇 시간이 지난 후, 딱 필요한 것만 처리하고 휴대폰을 다시 던져놓는다.

단순히 손 닿지 않는 곳에 휴대폰을 갖다 놓는 것만으로도 이번 연휴는 풍성하게 보냈다. 계획했던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LED 알림등이 보이지 않도록 살포시 뒤집어주면 금상첨화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일할 때, 누구를 만날 때, 그리고 주말에 뭔가를 하고 싶을 때 최대한 휴대폰을 멀리 두려고 한다. 환경을 조금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커피와 냉면의 공통점

바리스타 자격증 수업 들을 때 선생님이 알려줬다. 에스프레소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원두 굵기가 적당 해야 한다는 걸. 설령 같은 원두일지라도 적당한 굵기가 어제와 오늘 다를 수 있다는 걸. 로스팅 이후 원두의 변화나 서로 다른 날씨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어제의 분쇄도가 5였다고, 오늘도 5가 맞는지는 모르는 거다. 에스프레소를 제대로 만든다는 건, 예전에 성공했던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되 그때그때의 차이점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반영하는 일인 거다.

대접에 얼굴을 파묻을 듯이 후루룩 평양냉면을 흡입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음식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맛있는 음식의 비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맛있는 음식을 어제도 만들고,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같은 납품업체에서 같은 재료를 받아다가 육수를 삶더라도 어제의 육수와 오늘의 육수는 다를 수 있다. 냉면을 제대로 만든다는 건, 예전에 성공했던 방식으로 냉면을 만들되 그때그때의 차이점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반영하는 일인 거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돌아봤다. 어제의 알량한 성공 방정식을 오늘도 그대로 갖다가 낑낑대며 우겨넣고 있는 건 아닐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그걸 알 생각조차 못했던 건 아닐까. 그래 놓고는 왜 안되는 걸까 속상 해하는 건 아닐까.

새로운 휴가

졸업 후 일하기 시작한 이래 내게 휴가는 ‘해외여행’과 같은 의미였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이야기처럼 전역하고 혼자 보낸 유럽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휴가 계획을 세울 때면 이번에는 어느 나라를 갔다 올지 고민했다. 시킨 사람도 없지만 열심히 알아보고, 계획을 세워 비행기를 타고 그곳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시간. 그래야만 진정한 휴가라고 생각했었다.
내일부터 화요일까지 보내는 휴가 기간은 조금 다르게 보내려고 한다. 한적한 곳에 가서 정말 쉬다가 오리라 마음먹었다. 눈만 감으면 업무 생각으로 머리가 뒤죽박죽 되고, 회사 사람들이 얼굴이 안 좋다며 휴가 안 갈 거냐 물어보는 상황에서 어떻게라도 한 박자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게도 늘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단어, ‘힐링’을 포함해 후보지를 물색한 끝에 강원도 평창에 한적한 집을 하나 발견했다.

가서 무엇을 할지 딱히 정한 건 없다. 집 안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근처를 거닐며 맑은 공기를 마시거나 그럴 거 같다. 한 가지 마음을 굳힌 건 휴대폰은 저녁때까지 꺼놓고 지내야겠다는 거다. 이메일 알림도 모두 꺼놓고 말이다. 아직은 의심에 가득 차 있다. 출발 하루 전인 지금도 괜히 강원도까지 가서 돈 버리는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휴가라는 게 문자 그대로 쉬는 게 목적이라면 적절한 해답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내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휴가를 떠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이어폰 없이 뿅뿅뿅 소리 내며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아들딸이 뽀로로 영상을 보고 싶다 보채지만, 이어폰을 꼽아주면 귀 건강에 안 좋을까 끔찍이 염려된다. 이렇게 하늘도 감복할만한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그나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성인이 그런 식으로 휴대폰을 사용할 때면 더 이해가 안 된다. 오늘 출근길에도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서 연신 소리 내며 게임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 내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던 탓에 조금은 조그맣게 들렸지만, 신경이 곤두서는걸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몇 정 거장이 지나가기 전 그 학생은 내렸고, 주위는 평온을 되찾았다.

이렇게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왜 그럴까.

Flywheel

‘Flywheel’이라는 게 있다. 어떤 회사 혹은 사업이 성공하고 성장하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를 정의하고, 요소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개념이다. 첫 번째 요소는 두 번째 요소를 강화해주고, 두 번째 요소는 세 번째 요소를 강화해주고,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요소가 첫 번째 요소를 강화해준다. 좀 더 친근한 용어로 풀면 선순환 구조라는 말이 적합하다.

아마존을 다룬 책 The Everything Store를 읽다 보면 베조스와 임원들이 아마존의 Flywheel을 정의하게 된 순간이 나온다. 회사가 시작된 지 몇 년 만에야 정의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아마존을 많이 참고하는 우리 회사도 Flywheel이 있다. 아주 명료하게 성공 방정식을 표현하고 있다.

Amazon Flywheel

야심한 밤에 일을 하고 있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일을 하며 고민하던 프레임웍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보면 섬뜩한 경우가 많다. 평생 함께 하기는 힘든 회사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평생 함께 해야만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고민하다 그냥 놓아버린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그래서 문득 생각해본다. 내 인생의 Flywheel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