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짧은생각

ver. 32.9.9 끝자락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2002 월드컵 경기 중 선수 소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저 선수는 33살이라니 정말 늙었구먼 곧 은퇴해야겠어”. 그래 내일이면 내가 그 33살이 된다. 은퇴는 큰일 날 소리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뚱이를 볼 때면 슬퍼진다. 나 ver. 32.9.9, 2016년의 끝자락에서 올 한 해를 되돌아본다.

 

기억에 남는 일 TOP 3

  • 미국 가족여행
    • 가족 4명 모두가 함께 가는 것 자체도 굉장히 오랜만인데, 미국은 5살 때 한국 돌아온 이후 27년 만이었다.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년-샌프란시스코를 둘러보는 여정은 정말 평생 추억으로 남을 거다. 다시는 가족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가족여행이라 참 좋았다는 행복함을 동시에 남긴 모순투성이 여행.
  • 세 번째 직장
    • 배움과 좌절, 성장과 후회, 기쁨과 실망 모든 걸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직장 이후, 세 번째 직장을 얻었다. 거의 모든 물건을 온라인으로 구입하는 나지만, 온라인 쇼핑 회사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었다. 그동안 써본 적 없는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입사 전 기대한 바를 정확히 얻고 있다.
  • 지하철에서 귀인을 만나다
    • 어디로 가야 할 때면 주로 지하철을 이용한다. 가끔씩 예상치 못한 사람과 오랜만에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4월 오래도록 알고 지냈지만,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사람과 지하철에서 마주쳤다. 아주 귀하디 귀한 사람이었다.

 

기억에 남는 테크니들 기사 TOP 3

2015년 10월부터 테크니들 필진 활동을 시작했는데, 올 한 해 동안 딱 40개의 기사를 썼다. 매주 적어도 한 개씩은 쓰자는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꾸준히 했다는 점에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내가 쓴 기사 중 기억에 남는 3개를 골라본다.

  • 알파고 시대, 당신의 일자리 생존법
    •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직후 독자 반응이 좋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야심 차게 쓴 기사이다. 시류에 편승해 소재를 고르긴 했지만, 원문 자체가 워낙 좋아 스스로도 많이 배웠다. 예상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 페이스북 인스턴트 아티클에 비디오 광고 추가 예정
    •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면 안 된다는 배움을 얻은 기사였다. 당시 미국에서만 서비스되던 기능이라 직접 사용할 수가 없었기에, 소개 동영상 등을 참고해 기사를 썼는데, 페이스북 직원이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줬다. 부끄러운 마음에 곧바로 내용을 고치고, 앞으로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면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좌절)
  • 아마존이 창고에 상품을 뒤죽박죽 보관하는 이유
    • 필진 활동하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거다. ‘매주 1개씩’ 원칙을 지키려고, 일요일 점심 약속 가기 전 후다닥 쓴 이 기사에 열광적인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신기하다고 생각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신기했는지 페이스북에 계속 공유되더니 2016년 테크니들 인기기사 4위에 올랐다.

 

기억에 남는 영화 TOP 3

올해 40개 영화를 봤다. 생각보다 숫자가 적어서 놀랐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왓챠’에 기록했기 때문에 숫자는 정확하다. 그때마다 적었던 감상평을 덧붙인다.

  • 우리들
    • 보는 내내 감정이 요동쳤다. 미소가 절로 지어지다가도,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고. 영화 속 애들의 고민은 어른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 색, 계
    • 경계는 희미해지다가 무너지고, 내가 바뀐다

  • 최악의 하루
    • 여러개 가면이 겹치고 부서진 날. 무대인사로 멀찌감찌서 본 한예리는 얼굴이 어떻게 저리도 작을까 싶었다.

 

기억에 남는 지름 TOP 3

온라인 쇼핑을 좋아하다 보니 한 달에도 몇 개씩 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3가지를 고른다는 건 쉽지 않았다.

  • 스페셜티 원두
    • 주말마다 원두를 갈아 드립 커피를 내려마시다 보니 주기적으로 원두를 구입해야 했다. 구입처를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에 하루 날 잡고 열심히 조사한 끝에 보물 같은 원두 쇼핑몰을 발견했다. 스페셜티 원두 200g을 8천 원 정도에 판매하는 이 곳만큼 가성비가 뛰어난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 킨들
    • 영어책 읽는 횟수를 확 늘려준 1등 공신. 가방에 항상 넣고 다니며 주로 지하철 탈 때나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을 때 지루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 짐볼
    • 일하면서 동시에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사무실 의자 대신 짐볼에 앉아서 일하는 걸 떠올렸다. 즉시 조사를 시작했고, 가격대가 조금 높지만 안정성과 효과를 인정받은 TOGU 제품을 주문했다. 처음에는 피곤함 때문에 짐볼과 의자에 번갈아가며 앉았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짐볼에 앉아도 끄떡없다. 나를 보고 팀 동료들도 짐볼에 앉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책 TOP 3

‘왓챠’로 그때그때 기록해놓는 영화와 달리 책은 체계적으로 기록해두지 않아서, 순전히 현재 기억에만 의존해야한다. 다행히 아래 3개 중 2개는 블로그에도 적어놨었다.

  • 욕망해도 괜찮아
    • 책을 덮고 내린 결론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계속해서 경계를 넓혀가며 일종의 실험을 계속해야겠다. 그래야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고, 내 삶이 풍성 해질 테니까.

  • Models: Attract Women Through Honesty
    • 미국의 라이프 코치인 Mark Manson의 블로그는 비범한 통찰력이 담긴 글이 가득한, 내가 아주 좋아하는 블로그이다. 매우 세속적인 제목의 이 책은 단순히 ‘여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vulnerability)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강해지는 유일한 길이라는 역설이 담긴 아주아주 좋은 책.
  • 4001
    • 문득 내 기억들도 의심 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사오던 첫날, 정말 아파트 거실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을까. 또 자랑처럼 이야기하던 기억들은 정말 사실일까. 조금씩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기억을 조작한다. 그러면 내 기억이 100% 그대로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고 모든 사람이 어느 면에서는 신정아와 비슷한 사람인 걸까. 그녀가 처연해진다. 조작된 기억을 계속 굴려 앞으로 나아가 큰 눈덩이를 만들었던 죄가 참 무겁다.

 

나 ver. 32.9.9, 이제 업데이트 시점이 다가온다. 다들 알겠지만, 업데이트한다고 마냥 좋아지는 건 아니다. 업데이트를 후회하며 다운그레이드하고 싶다 아우성치는 사람도 있고, 더 심하게는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이번이 끝이 아니고, 계속 업데이트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ver. 33.0.0으로 업데이트하련다.

부전자전

대략 20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는 외국계 회사로 자리를 옮기셨다. 시티폰 부스가 동네에 막 생기려던 시기에 회사에서 제공한 ‘애니콜’을 들고, ‘빨콩’ 키보드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IBM 씽크패드 노트북을 들고 다니셨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호텔에서 컨퍼런스 발표나 식사를 하고 오시고, 간간히 신문에 칼럼도 연재하던 아버지의 ‘리즈’시절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아버지는 퇴근하고도 집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계속 작업하셨다. 당시 삼성 매직스테이션 ‘펜티엄’ 데스크탑을 사용하면서 컴퓨터를 즐겨하던 나는 아버지가 행복할 것이라 여겼다. 회사에서 공짜로 준 최신식 컴퓨터를 집에서도 만지작 거릴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껏 부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내게 아버지는 조금은 난처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 표정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숨에 써지지 않는 내년도 전략 문서를 붙잡고 있다가, 놓아두고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다. 옆에서 식사하시는 아버지를 보자 문득 20년 전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방문을 열면 노트북 화면을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계시던 뒷모습이 있었다. 도저히 답이 안 떠오르는데, 당장 몇 시간 뒤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문서에 괴로워하던 뒷모습이었으리라.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맞나 보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아버지를 아들은 20년 후에 따라 하고 있다.

사랑니 뽑았니

사랑니라는 나하고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평소에 치아 관리를 잘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치아가 건강한 편이었다는 점이 한몫했을 거다. 그러다 3년 전쯤인가 왼쪽 위 어금니 뒤에 사랑니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때도 별 걱정 없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왼쪽의 느낌이 싸해지면서, 급기야는 왼쪽으로 음식을 씹을 때 통증이 엄습해오자 덜컥 겁이 났다. 용의자는 사랑니였다. 내게도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부리나케 정보를 수집하던 중, 신촌에 사랑니 발치 전문 치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뽑은 사랑니가 3만 개가 넘는다는 그 치과. 그 자리에서 예약하고 어제 퇴근 후 방문했다. 신촌 현대백화점 뒤 셀 수 없이 많이 지나다니던 건물 위에 치과가 있었다. CT 사진을 보니 왼쪽 위 1개, 오른쪽 아래 1개가 눈에 들어왔다. 진료 의자에 앉히더니 갑자기 입을 벌리라고 하고는 마취를 시작한다. 어라 벌써 시작인가? 입 안이 얼얼해지자 의사 선생님이 다시 옆에 앉는다.

뽑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한 뭔가가 우지끈 뽑히는 소리가 들린다. 20초쯤 지났을까, 선생님이 다 되었다고 말한다. 안심시키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거즈를 물려준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달처럼 휘어있는 피 묻은 이가 하나 보인다. 집에 와서 앉아있는데, 2시간쯤 지나자 마취가 풀리면서 아파온다. 거울을 보니 왼쪽 볼이 퉁퉁 부어있고, 심술이 가득해 보인다.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도 입을 크게 벌리려 하면 아프다.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은 오묘하다. 어금니를 얍삽하게 공격하던 녀석이 사라졌지만, 꽉 차 있던 자리가 텅 빈 느낌이다. 이 공허함에 익숙해지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직 뽑지 않은 오른쪽 녀석은 사진으로 보니 거의 대청마루에 눕듯이 누워있다. 공사가 좀 클 거라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나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평화롭게 둘 것이다. 치과라는 곳은 어지간하면 가지 않는 게 좋은 곳이니까 말이다.

세일즈맨은 죽고, 배우는 빛나다

60년 연기 인생. 고작 30년 남짓 살고, 일하기 시작한 지 10년도 안 되었지만. 60년 동안 연기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배우 이순재 씨의 연기 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주말에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내 돈 내고 보는 공연을 굳이 행운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티켓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차례 시도한 끝에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봤던 아서 밀러의 연극 또한 이순재 씨와 인연이 깊다. 그가 연출하고 서울대 극단이 열연한’시련’이었기 때문이다. 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 작품을 보면서 꽤나 깊은 울림을 기억을 떠올리며, 그와의 인연을 유달리 강조한다. 상대방에게 밀쳐져 넘어지고 다시 힘겹게 일어서는 장면에서는 저러다 다치는 건 아닌지 가슴을 조아리며 바라보기도 했다.

함께 열연한 손숙 씨의 연기 인생도 50년이 훌쩍 넘는다. 둘이 합쳐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벼리어진 날카로움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아서 밀러의 대본대로 매우 어둡고 쓸쓸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임에 틀림없나 보다. 1940년대에도 주택 대출을 갚으려 발버둥 치고, 노후를 걱정하고, 가족 간의 냉소를 벗어나려 애쓰는 모습을 보니 ‘헬조선’은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토록 어두운 작품 속에서도 이순재 씨는 눈부시게 빛났다. 다시는 없을 그의 작품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던 시간 또한 빛났다.

귤 까먹기

귤 까먹는 시간은 가장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아쉬운 시간이다. 곱게 껍질을 벗겨내고, 새콤 상콤한 속살을 입에 넣는 느낌은 행복 그 자체이다. 참고로 귤을 적당히 때리면 더 달아진다. 호기심 천국에 나왔다. 반면에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해지는 탓에 책이나 신문을 읽지 못하고, 휴대폰으로 인터넷도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오늘도 역시나 아쉬움을 느끼려던 찰나, 짧은 동영상이나 하나 틀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틀어놓은 TED 영상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대학교 4학년 때, 그러니까 바야흐로 7년 전(아아 세월이란!) 당시에 TED는 최첨단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물도 아니고 세물 정도 간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재생 버튼을 누른 영상은 ‘100일간의 거절에서 내가 배운 것’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곧 내 나이 또래의 중국계 남자가 나와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내 영상에 빠져들었다.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초롱초롱 쳐다보기도 하면서 어느새 마지막 귤과 함께 영상도 끝났다.

발표자 지아 쟝은 여섯 살 때 친구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이 서른이 된 자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이를 깨부수려고 한다. 그러면서 100일 동안 무모하다시피 한 행동을 하며 무수히 많은 거절을 경험해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상황 자체가 불편해 도망쳤지만, 점점 거절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 어떤 때는 거절을 승낙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예상한 것보다 더 그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 가장 큰 웃음을 주었던 건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서 올림픽 오륜기 모양 도넛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에피소드였다.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요청이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성심성의껏 만들어진 오륜기 모양 도넛을 얻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자꾸만 잊어버리는 진리가 다시 떠올랐다. TED 영상 꼭 한번 보시라.

본격 계단 이용기

지난주부터 출근길이 새로워졌다. 사무실이 있는 18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결심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우리 회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엘리베이터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지한 이야기이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줄이 건물 밖으로 주욱 이어질 정도니까 말이다. 참고로 나는 “헬베”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어차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쏟아야 한다면, 그냥 걸어 올라가는 게 운동도 되고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발단이었다. 게다가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몸서리치게 느끼고 있었기에 나쁠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처음 계단을 이용한 날의 계획은 더 창대했다. 머리 속으로 그날 할 일을 정리하면서 올라가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한층 한층 올라갈수록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힘들다 그만하고 싶다’. 가까스로 자리에 도착한 후에도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첫날 기록은 5분 30초였다.

계단으로 출근하기를 하루 더 할 때마다 몰아쉬는 숨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창피할 정도로 헉헉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조금씩 기록도 단축하고 있다.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뭐라도 꾸준히 하면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지나 보다. 이제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이러다 18층까지 1분 만에 주파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기사도(記事道)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사’라는 걸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최신 동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동력을 찾고, 개인 브랜딩도 할 겸 시작한 일이었다.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1주일에 적어도 하나는 쓰려고 노력했다. 관심 분야에 대해 배우면서 얻은 정보를 다른 사람가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건 참 좋다.

그 1년 동안 하나 확실하게 결론 내린 건 내가 인기 있는 기사를 예측하는데 잼병이라는 거다. 보통 페이스북 ‘좋아요’, ‘공유하기’ 수로 인기도를 파악한다.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열정을 쏟고, 내용에도 자신 있고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 기대했던 기사가 소리 소문 없이 파묻힌다. 반면에 1시간 만에 뚝딱 완성해낸 기사가 여기저기 공유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팀원들이 잘 봤다며 알려준 글은 점심 약속 가기 전 급하게 쓴 실적 채우기용이라는 걸 고백한다.

그러다 보니 과연 잘 쓴 기사라는 게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만약 언론사에서 기자들의 성과를 측정하고 싶다면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 ‘XXX, 숨겨진 비밀, 알고 보니…’ 등 자극적인 제목과 사진을 걸면 조회수는 올라간다. 그렇다고 그게 잘 쓴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정성 들여 쓴 기사가 사람들 손에 익지 않을 때, 잘 쓴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기사도(記事道)가 필요하다. 젝키만 기사도(騎士道)가 필요한 게 아니다. 내게도 기사도가 필요하다.

책과의 이별공식

책장에 틈 없이 빽빽해질 때면 중고로 팔 책을 고르게 된다. 내가 삼은 기준은 세 가지였다. 그 책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있는지, 읽겠다고 꺼내더라도 부담이 덜한지, 그리고 다시 읽는 시점에 충분히 활용 가능한 내용인지이다. 어제서야 다 읽은 ‘사피엔스’를 예로 들어보자. 읽으면서 다음 장이 기다려졌을 만큼 흥미로웠고, 내공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위 기준에 비춰보니 두 번째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어마 무시한 두께가 위압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인생학교: 일’의 경우는 나를 당황시켰다. 읽은 게 분명한데, 어떤 내용이 담겼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몇 장 넘기다 보면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첫 번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디선가 본듯한 뻔하디 뻔한 내용이 책에 꾹꾹 눌러 담아져 있었다. 이후에 읽은 비슷한 내용을 담은 수많은 기사와 블로그 글들에 기억이 덮인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팔기로 결정한 책들을 상자에 들고 택배를 부치러 가는 중에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기억하지도 못할 내용이라면 그 책을 고른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제대로 읽지 못한 내 잘못일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방이 넓고, 책장이 넉넉했다면 이렇게 책과 이별하는 일이 없을 것을!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택배를 부쳤다.

다리 위

어머니는 책을 참 좋아하신다. 정확하게는 심리학 관련 책이나 자기계발 책을 좋아하신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서 왜 바뀌는 건 없는 것 같냐며 어머니를 놀리곤 했다. 며칠 전에도 내 책상에 있던 ‘트리거’ 책을 가져가시고는 아직 돌려주지 않고 계신다.

아침을 먹으려 식탁에 앉았다.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이라는 책이 식탁에 놓여있었다. ‘요즘 초조하시냐’라고 장난스레 여쭤봤더니, ‘금강경’ 내용을 담은 참 좋은 책이라며 대목 중 하나를 이야기해주셨다. 어떤 목적지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다리에 해당하는 게 여러 개 있다. 예시로 생각해볼 수 있는 다리는 ‘돈’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목적지로 가던 길을 멈추고, 다리 위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고 한다.

식탁에 앉아서 계속 곱씹어봤다. 나 역시도 원래 향하던 목적지를 잃고 다리 위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해보았다. 결론은 아직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사실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도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몸을 쓰든가, 만들어내든가 (You write, you make, you make)

며칠 전 구글은 딥러닝 기술을 적용해 번역 정확도를 높였다고 발표했다. 긴 문장을 입력하더라도 기대를 뛰어넘는 정확도를 보여준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평이다. 더욱 무서운 건 스스로 학습해나가며 점점 더 정확히 번역해낸다는 거다. 번역 기술이 발달할수록 외국어 능력이라는 건 승마나 라틴어처럼 고급스러운 취미로 변모할 것이라는 어떤 글이 떠올랐다.

흔히들 인공지능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창조적 활동 영역을 빼앗을 수는 없을 거라 말한다. 그러나 아래 그림을 살펴보면 그 또한 아리송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인공지능에게 렘브란트 화풍을 학습시켜 만들어낸 그림이다. 전문 교육을 받은 이가 그렸다 해도 믿을만하고, 심지어 렘브란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_89104291_rembrandt

음악도 비슷하다. 스스로 소리를 분석하는 알고리즘이 2000번째 시도 끝에 만들어낸 음악도 그럴싸하다. 만약 GD나 다프트 펑크의 음악을 계속 분석하게 하면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음악이 탄생할 수 있다. 그것도 별다른 노력 없이 버튼만 띡하고 누르면 말이다.

좀 더 생각해보니 적극적으로 몸으로 때우는 예술이라면 당분간은 인간이 더 유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곰팡이를 물감 삼아 그린 그림, 버려진 보트를 구입해 설치하는 예술 등 하나의 재료가 아니라 여러 개의 요소를 조합해내는 창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곰팡이를 배양하고, 버려진 보트를 구하러 고물상을 찾아가 협상하고 가격을 지불하는 과정은 인공지능에게 꽤나 큰 어려움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은 두려울 게 없고, 오히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대학교 마지막 학기 들었던 특강에서 하버 디 디자인대학원장은 자동으로 건물을 설계해주는 프로그램을 보여줬다. 충격적인 시연 장면을 접하고 나서 내가 물었다, 그러면 이제 디자이너라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냐고. 그러자 그는 이런 프로그램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답했다.

이 글의 제목은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았다. 언뜻 봐도 번역이 이상하다. 그렇다 아직은 얕봐도 된다. 그러나 몸을 쓰든가, 만들어내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