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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트로이의 여인들

일요일마다 ‘중앙선데이’라는 주간지를 읽고 있다. 고백컨데 나는 아는 척하기 좋아하고, 으스대기 좋아하고, ‘있어빌리티’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중앙선데이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어디를 가더라도 슬쩍 이야기하기 좋은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한 장 한 장 그냥 넘어갈 지면이 없다.

그런 중앙선데이에서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의 관람권을 나눠준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주저하지 않았다. 중앙선데이를 만난 이후로 인생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를 구구절절 적어 내려 가며 꼭 관람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편집장님 이하 직원들의 노고에 깊은 감 사또 한 잊지 않고 적어서일까, 축하한다는 메일과 함께 관람권을 받게 되었다.

공연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딱 두 가지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출가 옹켕센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과 국악계의 아이돌인 김준수가 출연한다는 것.(동방신기 김준수가 아니다) 물론 옹켕센과 김준수에 대해서도 중앙선데이를 읽고 알게 되었다. 창극을 듣거나 보는 건 처음이었고, 김준수는 ‘이별가’로만 접했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업무를 처리하고 나서 인지 몇십 번 하품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가멤논’, ‘헥토르’ 등 그리스 신화의 인물을 창으로 부르는 모습에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몰입하게 되었다. 주요 인물의 성격이나 운명을 드러내는 악기가 다르고, 최고 미녀 ‘헬레네’로 여장한 김준수가 피아노 선율에 맞춰 가요를 부르는 듯 심경을 토로하다가도, 창을 하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주인공인 왕비 ‘헤큐바’로 분한 김금미 씨가 작품 전체를 멱살 잡고 끌고 다니다 세트 맨 위에 올라 종반부를 진두지휘할 때는 머리가 주뼛주뼛 섰다.

흡사 종교의식을 보는 듯한 노래와 강렬한 연주, 멋진 연출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워낙 실험적인 작품이다 보니, 낯선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창극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과 선입견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받아들이기 쉽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보니 금발의 벽안 외국인들이 여러 명 와있던데, 어쩌면 그들이 나보다 더 만족해하지 않았을까.

비로소 창극, 옹켕센, 김준수에 대해 좀 더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있어빌리티를 얻었다.

필리핀 영어샘과 감자탕 먹은 후기

필리핀 전화영어 선생님이 서울에 놀러 왔다. 작년에는 홍대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먹었고, 이번에는 을지로에서 감자탕과 순대를 사줬다. 몇 가지 인상적인 기억을 적어본다.

  1. 하얀 피부를 정말 정말 부러워한다. 내가 한국 사람 중에서도 하얀 편이긴 하지만, 내 피부색이 정말 부럽다는 이야기를 몇 번 했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고, 미백 화장품이 동남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다는 사실을 봤을 때 하얀색 피부에 대한 동경이 강한 듯 싶다.
  2. 식사량이 적다. 감자탕과 순대를 맛보게 해 주겠다며 1인당 감자탕 한 뚝배기, 그리고 나눠먹을 순대 한 접시를 시켰는데 양을 보고 깜짝 놀라 했다. 한 사람이 한 개씩 먹는 거냐며, 필리핀에서는 2~3명이 나눠먹을 양이라고 했다. 옆 테이블에 할머니 두 분이 한 뚝배기씩 뚝딱 드시는 걸 보고도 경악.
  3. 식민지 시절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일제 식민지 시절을 수치스러운 역사로 생각하고, 이 때문에 일본에 반감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의 식민지였었다는 걸 오히려 행운이라 여기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눈치였다. 나아가 계속 미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면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4. 낙엽 떨어지는 장면에 환호한다. 연신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하고, 큰 낙엽을 기념으로 들고 가겠다고 했다. 그 나라에는 가을이 없으니 그러는 게 이해가 간다.
  5. 가톨릭이 보편적인 사회이지만, 여호와의 증인 신자도 많고, 동성애자 커밍아웃도 한국보다 자유로운 듯했다. 다만 병역 의무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고통받는 것도 비슷했다.
  6. 내 나이를 물어보길래 맞춰보라고 했다. 27살 아니냐고 하더라. 후훗.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들이 살고 있는 다바오로 놀러 오라고 했다. 계획을 짜 봐야겠다.

11월 5일

정치란 참 특별한 소재이다. 다른 사람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 다 하는 사람조차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은 주변을 살피곤 한다. 부모님과 이야기 중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주제가 바로 정치이기도 하다.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 게 일종의 미덕이기도 하다. 이렇게 민감한 주제라는 게, 그만큼 정치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최근 몇 주 동안 지금과 많이 다른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봤다. 말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자율주행 자동차가 등장하면 출퇴근 시간이 긴 게 큰 문제는 안 되겠구나, 혹은 기본소득 시대가 온다면 나는 뭘 하고 싶을까 등의 별거 아닌 고민들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턱 하고 숨이 막혔다.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고민이 의미가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광화문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규탄하는 자리에 참석해본 건 처음이었다. 평화롭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 온 가족이 다 나온 경우도 많았고, 연인들, 중고등학생들,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세월호 유가족, 대학생, 종교계 등 중간중간 여러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했다. 각기 각색의 사연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은 건 아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구호만큼은 모두들 열광적으로 외쳤다.

한 연사가 외쳤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오는 가이 포크스가 국회의사당 폭파 거사일로 정한 게 바로 11월 5일 오늘이라고. 어떤 결말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따금씩 기억나는 날일 것 같다. 그리고 그냥 기억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날로 남게 되길 기원한다.

요즘 일상

피곤한 몸을 이끌고 후다닥 준비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여의도역에서 갈아타는 열차는 그 유명한 9호선 급. 행. 서울시내 지하철 중 출근시간대 혼잡도가 가장 높은 노선 5개 모두가 9호선 급행이다. 이미 빽빽한 전동차를 보며, ‘오늘은 힘들겠구나’ 생각하지만, 뒤에서 밀치는 사람과 힘을 합치다 보면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렇게 몸을 구겨 넣은 9호선이 나를 회사까지 데려다준다.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의로 보내고, 중간중간 짬나는 시간에 밀린 이메일 답장을 쓴다. 구내식당에서 테이크 아웃해온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다시 회의와 회의. 회의실이 어찌나 건조한지, 얼굴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담당하는 제품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다가도, 이내 마음을 다잡고 상황을 확인한다. 그러기를 반복하면 이미 얼굴에는 혼이 사라져 있다. 그러고 집에 들어와 저녁 먹으면 진이 빠져있다.

문득 생각해보았다. 회사 사람 이외의 소중한 사람들과는 몇십 분도 쓰지 못하는 하루하루. 참으로 길면서 짧은 게 인생이라는 걸 느끼는 요즘.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회사, 그리고 일과 떨어진 생각을 하는지.

내가 이러려고 회사 다니냐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대통령 특집 글입니다. 힘들지만, 많이 배우고 즐겁게 잘 지내고 있어요*

도와주면서 살아야지,그렇게 살면 안된다

퇴근하고 집으로 향하던 중 지하철 역에서 내렸다. 이제 10분 좀 안되게 걸어가면 집이다.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는데, 귀에 꼽은 이어폰에서는 다음 팟캐스트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를 핑계로 대부분 영어 팟캐스트인 재생목록 중 2개밖에 없는 한국어 팟캐스트. 얼마 전 화재가 난 원룸에서 사람들을 깨우고 다니다 정작 자신은 숨을 거둔 안치범 씨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롭거나 유용한 정보가 아닌지라 곧바로 넘기려 하다가, 이내 눈이 촉촉해졌다.

다른 사람은 살리고 정작 자신은 숨을 거뒀다는 사연이 슬픈 것도 있었지만 중간에 소개된 일화가 압권이었다. 생전에 안씨와 TV 뉴스를 보던 그의 부모님은 “저런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돕기보다는 너 자신부터 챙기라고” 말했다 한다. 부모 된 마음으로 자식이 걱정되어 꺼낸 이야기에 안씨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도와주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 대목에 이르자 눈이 더 촉촉해졌다. 작은 외삼촌 가족과 왕래가 있던 집 아들이라는 것도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몇 주 전 퇴근 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타러 걸어갈 때였다. 옆을 보니 한 남자분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술을 많이 마신 듯 보였지만, 어디가 아파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찰나의 순간 동안 고민에 휩싸였다. 저 사람을 도와줄까. 이내 마음을 바꿨다. 저 사람을 도와주다 보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계속 머리 속으로 되뇌었다. 아픈 게 아니라 술을 마셔서 그러는 걸 거라고. 그러나 집에 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다. 만약 아픈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냥 지나쳐서 더 곤경에 빠진 거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에.

요즘 너무 나만 챙기며 살았던 건 아닐까 다시 살펴본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름, 이름을 불러줘요

몇 주 전부터 다니는 회사는 전 직원이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취지를 설명 듣지는 못했지만, 수평적인 의사소통과 상당히 많은 외국인 임직원을 배려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따로 영어 이름을 짓기보다는 한국어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지만, 그러기 힘들 것 같아 포멀 하게 ‘SH’라는 이니셜로 불러달라 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나를 직책으로만 부르는 일이 벌어졌다. ‘에스에이치’ 5음절이 너무 길다는 이유였다. 불리지 않는 이름은 죽은 이름이나 다름없다. 그러던 중 옆자리 ‘타코’님께 물어봤다. 왜 타코냐고. 타코를 좋아한단다. 그래서 나도 정했다. ‘나초’로. 2음절로 짧기도 하고, 스페인어 이름인 ‘Ignacio’의 애칭이 나초라는 논리와 함께. 그러자 동료들이 자꾸만 이름을 불러준다. 나를 너무 자주 찾아서 이제는 그만 불러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서구권에는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호칭을 이름을 빼고 성으로만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리오넬 메시’의 유니폼에는 ‘메시’라고만 적혀있다. 골을 넣거나 어시스트를 보며, 해설자와 캐스터는 외친다. ‘메시! 메시! 메시!’.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리오넬’ 혹은 ‘레오’라고 불렸을 거고, 그게 더 와 닿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대개 이름이 3음절이고, 글씨 너비도 좁아 유니폼에 성부터 이름까지 다 적을 수 있다. 그래서 성뿐만 아니라 이름을 불러준다. ‘박지성!’이라고. 나도 상상해본다. ‘이!’만 들었을 때와 ‘이승환’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승환!’이 훨씬 더 뭉클하다.

그렇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나는 완성된다. 그러니 이름을 불러다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 김춘수

오른손잡이로 산다는 것

“왼손으로 밥을 먹어야 할까 봐”

저녁 식사 중 아버지께서 중얼거리셨다. 최근 오른손 힘줄이 부어올라 병원을 다녀오셨는데, 가급적이면 덜 사용하는 게 회복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상상해보았다. 내가 만약 왼손잡이라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왼손잡이라서 특별히 좋을 건 없는 것 같다. 밥 먹을 때 왼편에 오른손잡이가 앉으면 팔이 맞닿아 불편할 거다. 또 세상 대부분 물건이 오른손잡이를 전제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억울할 것 같다. 마우스, 문 손잡이, 지하철 개찰구 등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여러 개다.

이렇게 세상 대부분 물건과 시스템이 오른손잡이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오른손잡이가 더 우수해서가 아니다. 그냥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수가 더 많은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주류이기에 누리고 있는 ‘산소 같은’ 기득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잡이라는 것, 두 다리 멀쩡하다는 것, 전 세계 200개 나라 중 그래도 상위권인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서울에 산다는 것, 그리고 남자라는 것도. 왼손잡이, 휠체어, 경북 성주군, 여자, 즉 주류가 아니기에 겪는 불편함과 억울함을 내가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없는 곳에 가서야 산소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짧게 상상해봤지만, 오른손잡이라는 사실이 참 감사하다. 그리고 기득권을 계속 철밥통처럼 끌어안지 않고, 널리 퍼뜨리려는 노력을 기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저녁 아버지는 중얼거리셨고, 나는 감사하는 마음과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다.

대통령처럼 말하기

대통령처럼 말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몇천만 명의 지지와 후원을 받으려면 보통 말솜씨로는 어림도 없다.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이 있는 걸 보면 글쓰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말을 더 많이 하는 대통령에게 말솜씨는 필수이다.

요즘 내가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자면 대통령이 따로 없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처럼 말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말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던 문장이 갑자기 새 생명을 얻어 더 길어진다. 주어와 술어의 호응도 없다. 마치 탱고를 추는 남녀의 발처럼 서로 마주치는 법이 없다.

이렇게 대통령처럼 말하게 된 계기는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얼마 전 옮긴 회사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용을 잘 모르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일이 생긴다. 모르는데 아는 척해야 하는 상황. 딱히 전달해야 할 생각을 모르겠지만, 일단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다 보니, 온갖 힘을 짜내서 말을 이어나간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도 잊은 채.

회사 일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도 덩달아 대통령처럼 말한다는 게 더 큰 걱정이다. 해결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대통령이라도 미국 대통령처럼 이야기하면 좋겠는데, 답답하다.

올림픽 순위가 알려준 본심

올림픽 시즌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중요한 경기 일정을 표시해두고 중계를 챙겨봤었는데, 이번 올림픽은 그리 관심이 가지 않는다. 이유를 생각해봐도 뚜렷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나이 들어서”라는 범용적인 이유말고는 말이다.

올림픽과 관련해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종합 순위라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어릴 적 읽은 역사책에는 “88 서울 올림픽 종합 순위 4위”라는 대목이 뚜렷이 기억나는데도 말이다. 우리나라처럼 메달 색을 나눠서 순위를 정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메달 색 관계없이 총합을 기준으로 삼는 나라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예 순위라는 걸 언급조차 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는 것도 말이다. 정말이지 역사책 저자를 찾아가고 싶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종합순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언론과 주변 사람들을 보면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그들은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바라보는 냉혈한들이었다. 4년을 참고 견디며 흘린 땀방울을 획일적인 기준으로 줄 세운다는 사실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을 짓곤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올림픽은 결과보다도 참가에 더 큰 의의가 있다. 그 숭고함을 짓밟는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내가 참 대견스러웠다.

그러다 메달리스트 연금 제도에 대한 내 입장과 연결시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연금 제도는 메달 색에 따라 점수와 지급액을 다르게 책정하고 있다. 매우 합당한 제도라고 느껴졌다. 결과에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면, 포상도 달라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메달이어도 1등, 2등, 3등은 분명 다른 거다.

불현듯 두 가지 생각이 연결되었다. 메달 색으로 종합순위를 매기는 사람들을 비웃지만, 그 기준에 근거한 연금 제도는 찬성하는 나. 그리고 깨달았다. 그런 종합순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게, 결코 “메달 색에 관계없이 흘린 땀은 값지다”라는 정신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난 그저 “공식적”이고, “권위가 있는” 기준이 아니기에 인정할 수 없었던 거였다. 그리고 “너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올림픽 순위라는 건 말이야…”라는 지적 뽐내기도 한몫했다.

안 그런 척, 숭고한 가치를 지닌 척했지만 뼈속까지 경쟁과 순위 개념이 박혀있었다. 무슨 대단한 인격체 인양 으스대며 다른 사람을 슬몃 얕봤지만 말이다. 이번 리우 올림픽, 선수들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서울에서, 나는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책을 놓기 싫을 때

내려놓지 않고 계속 읽고 싶은 책들이 가끔 생긴다. 더 읽더라도 다 읽지 못하고 잠들거라는걸 알지만, 그래도 더 읽고 싶은 책들이 가끔 생긴다. 갈등과 선택의 순간. 어떻게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