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짧은생각

이메일로 일하는 회사

지난 주부터 다니고 있는 내 인생 세번째 회사. 여기는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메일로 이뤄진다. 문제는 팀 주소록에 포함되다보니,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메일도 쏟아진다는 점.

긴 쓰레드의 이메일은 안 읽게 되는데, @이름 등의 멘션 기능이 없다보니 따로 확실한 알림도 오지 않는다.

좋은 점이라면 채널이 하나이다보니, 히스토리를 검색하기가 그나마 쉽다는 점. 게다가 구글느님의 검색 기능은 강력하다.

라벨이나 발신인 기준 분류 등 여러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좀 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말이다.

술잔이 짠

지난 주부터 함께 하고 있는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했다. 무의미한 시간을 줄이고, 보람을 얻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최근 무한 반복 중인 판소리

한국 사람이지만 판소리를 직접 찾아서 들어본 적은 없다. 딱 한번 갔던 공연은 군 생활 중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에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지만, 그건 사단장의 지시였다. 고루하고, 가사도 잘 들리지 않는 음악. 그게 판소리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번 주말 동안 무한 반복해서 듣고 있는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판소리이다. 정통 국악은 아니고, 심지어 아일랜드 풍 음악에 덧입혀진 판소리이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고? 일단 한번 들어보자. 월드뮤직으로 유명한 밴드 ‘두번째달’의 대표곡인 ‘얼음 연못’에 판소리 ‘이별가’ 가사를 붙인 곡이다.

https://youtu.be/XdOgijH5C8Q

처음 들었을 때, “갈까부다”하는 첫 소절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귀를 쫑긋 세우며 듣다가 마지막에 이르자 주저 없이 ‘반복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방금 이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튜브를 검색하다 보니, 김준수 씨가 아니라 이봉근 씨가 부른 것도 다른 매력이 있다. 하지만 김준수 씨 버전이 더 사무치고, 애절하고 찢어지는 느낌이랄까. 가슴이 복잡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정도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두번째달 공연이 있으면 꼭 가볼 생각이다.

9년째 같은 노래, Change the world

내 컬러링은 9년째 같은 노래다. 바로 Eric Clapton의 “Change the world”. 군대 선임이 듣던 노래가 너무나도 좋아서, 제목을 물어보고 전역 후 휴대폰을 개통하며 컬러링으로 지정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버전은 Babyface의 MTV Unplugged 앨범에 있는 버전. 잔잔한 원곡과 달리 흥겹게 편곡딘 노래를 두 명가수가 부르는 걸 듣고 있자면, 신이 나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음원 지원이 안 되는 탓에 내 컬러링은 원곡이지만.

어둑어둑한 밤에 들으면 특히나 좋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세상도 바꾸겠다는 패기와 진심. 노래에 묻어나온다.


Babyface/Eric Clapton Change the World 작성자 Keo

If I could reach the stars
Pull one down for you
Shine it on my heart
So you could see the truth

That this love I have inside
Is everything it seems
But for now I find
It’s only in my dreams

If I can change the world
I would be the sunlight in your universe
You would think
My love was really something good
Baby if I could change the world

If I could be king even for a day
I’d take you as my queen
I’d have no other way
And our love will rule
In this kingdom we have made
‘Til then I’ll be a fool
Wishing for the day

말조심, 또 말조심

몇 년 전이었을까.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해 크게 욕을 먹은 적이 있다. ‘companion’이 아니라 ‘reject’의 개념으로 이해했었다. 동물을 거부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동물 애호가인 상대방이 더 목소리를 높인 건 당연지사. 설전 중 이상한 느낌을 받아, 의미를 물어보고 실수를 인정했지만 상대방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번은 ‘육덕’이라는 단어를 적절치 못하게 사용한 적도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처음 단어를 보고는 ‘풍만’과 비슷한 어감을 가졌다고 이해했다. 여자들도 섞인 자리에서 ‘육덕’을 입에 올리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성적인 표현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전효성이 출연한 방송 영상을 보던 중 문득 떠올랐다. 인기가 급상승하던 시기, 일베 식으로 ‘민주화’ 단어를 사용해 인터넷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팬클럽 게시판에서 ‘민주화’ 단어를 쓴 글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썼다고 했다. 처음에 그 변명을 듣고, “어떻게 그걸 몰라” 생각했는데 내 경우를 떠올려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요즘 유난히 말할 기회가 많다. 정확하게는 유독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할 말이 많은가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는 길에 가끔씩은 괜한 말을 했나 싶기도 하다. 말을 아끼고 다듬어야겠다. 생각하는 바가 온전히 전달되도록 정제해야겠다. 아는 것만 말하고, 모르는 건 말하지 않아야겠다. 말조심, 또 말조심하자.

굳은 심지, 주변의 압박, 그리고 얇은 귀

좋은 아이디어가 널리 수용되는 이유는 장점이 분명하기 때문일까? 팟캐스트 “Revisionist History”를 듣다 보니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이 명제에 반론을 제기한다. 주변의 압박 때문에 분명한 장점이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수용되지 않는 사례를 파고든다.

NBA(미국 프로농구)의 전설적인 선수인 릭 베리(Rick Barry)는 아래에서 위로 던지는 자유투로 유명했다. 이 슛 자세로 94%가 넘는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지만, 그 말고 그렇게 던지는 선수는 없었다. 심지어 윌트 체임벌린의 경우 아래에서 위로 던지며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지만, 이내 예전 자세로 돌아왔다. “바보 같고” “계집애 같은” 자세라는 이유로 말이다. 남자 선수만 그런 게 아니다. 여자 선수들도 이 자세를 꺼려했다. 그러면서도 자유투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장점은 인정했다.

rickbarry

http://www.process.st/wp-content/uploads/2015/12/rickbarry.png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영어 발음이 멋지다. 그롸노베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흔히 우리는 어떤 행동을 이끄는 건 그 사람의 신념과 믿음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변에서 얼마나 그 행동을 수용하는지가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신념과 배치되더라도 주변의 행동을 수용하는 경우도 많다.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던 사람도 친구들을 태우고 밤에 운전할 때 150km으로 달릴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게 옳다고 믿으면서 괴롭힌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다.

결국 내적 요소인 신념과 외적 요소인 주변의 수용도가 결합되어서 행동을 이끌어낸다. 또 하나의 요소는 주변 사람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이다.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곧 죽어도 자신의 길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 주변에서 하는 말들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들 중에 혁신가나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얇지 않은 귀 때문에 사랑을 받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건 결국 사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릭 베리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굉장히 이상하다. 친지들이 그를 비판하는 글이 자서전에 실려있다. 한 예로 그의 어머니는 “릭은 돈 많이 벌고 유명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람? 또 다른 아들 데니스의 삶이 더 훌륭하다”라고 적었다. 나라면 자서전에 그런 내용 못 실을 거다. 하지만 그만큼 릭 베리는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유투 성공률을 높이는 거였고, 주변에서 비웃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신념에 위배되지만 사회적 맥락에 따라서 행동했던 몇몇 순간들이 떠올랐다. 눈 감고 넘어갈 수 있는 순간도 있고, 후회가 되는 순간도 있다. 굳은 심지, 주변의 압박, 그리고 적당히 얇은 귀. 이 세 개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민해야겠다.

덕후, 멋진 그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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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고(Pokemon Go)’로 온통 난리다. 주변에 IT 종사자와 띠부띠부실을 모았던 친구들이 많아서인지 ‘난리’로 느껴진다. 숨겨져 있던 ‘포덕’들이 스멀스멀 타임라인을 장악했다. 포켓몬에 관심이 없지만, 하도 난리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힙(hip)’하고 ‘쿨’한 사람이 되려면 속초 가서 인증샷 올려줘야 되는 건가. 하지만 열광적인 친구들은 이미 속초에 가있다. 내가 인증샷을 올린다고 하더라도 한발 늦은 거다.

음지에 머물러있던 ‘덕후’가 양지로 나오고 있다. 이번 포켓몬뿐만이 아니다. 레고나 베어브릭 등 장난감, 애니메이션 그리고 아이돌까지. 덕후들이 전방위적으로 올라온다. 심지어 ‘덕밍 아웃’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되었다.

첫째는 자기만족 소비의 증가이다. 개인의 삶을 희생하고 월급을 아끼더라도 서울 시내에 집을 사기는 어려워졌다. 노력의 과실은 줄어들고, 선천적인 요소가 더 중요해졌다. 노력해도 안될 거라는 걸 깨달으면서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굉장히 비싼 외제차를 지른 친구는 어차피 집도 못 살 거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을 준거라 이야기했다. 어차피 집 못 살 거 레고나 사야겠다. 초밥이나 먹어야겠다. 여행이나 가야겠다. 이렇게 관심사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관련 시장의 규모도 커지면서 관련 항목의 질도 좋아진다.

둘째는 소셜 미디어의 확산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보통 자랑의 공간이다.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를 암시하는 행복한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사람은 행복하다. 게다가 페친, 인친들은 나와 비슷한 배경과 관심사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소셜 미디어의 인간관계는 동질성에 기반해 굉장히 선택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니 내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물아래 숨어있던 덕후들이 스멀스멀 위로 올라온다.

마지막 이유는 ‘개인화’이다. 대부분 미디어들은 사람 개개인에게 맞는 콘텐츠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소셜 미디어의 콘텐츠 노출 알고리즘은 좋아하고 관심 있는걸 더 보여주도록 자기강화가 일어나는 구조이다. 소셜 미디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터넷 서비스들은 ‘개인화’라는 기치하에 좋아하고 관심 있을 것 같은걸 파악하려고 애쓴다. 결과적으로 덕질의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이 굉장히 쉬워진다.

그러다 보니 덕밍 아웃에 필요한 용기는 적어지고, 보상은 커진다. 행복하고 후련할 뿐만 아니라, 멋지고 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게 덕후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라고 생각한다.

자신만만해진 덕후를 보며 부러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게 나다. 덕밍 아웃할 수 있는 게 없다. 좋아하고 관심 있는 건 많다. 아스날 팬사이트에 계속 들락거리며 어떤 선수를 영입할까 확인한다. 1주일에 한 번은 영화관을 가겠다며 새해 계획을 세우고, 스타워즈의 ‘타이 파이터’ 레고를 결제하며 들떴다. 가고 싶은 맛집을 적어두거나 찾는다. 하지만 전 이거 덕후예요!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없다.

몇 년 전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친구와 홋카이도를 갔었다. 하루는 오타루의 운하에서 일몰을 찍겠다고 했다. 일몰이니까 5시 혹은 6시쯤 가야겠네 생각했지만, 그 친구는 2시에 운하로 가서 좋은 자리를 맡자고 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나는 더 일찍 와서 자리를 맡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경악했다. 좀 더 일찍 올걸 후회와 함께 친구는 영하 10도가 넘는 매서운 날씨 속에서 그렇게 4시간 가까이 자리를 지켰다. 친구가 참 부러웠다. 미친 듯이 몰두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부러웠다.

미친 자가 세상을 바꾼다. 세상 모든 덕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글을 마무리한다. 이상 미치지 못해 아쉬워하는 자가 적는다.

 

이미지 출처: https://brunch.co.kr/@brunch8m3s/7

하수의 글쓰기

writers-block

열심히 글을 쓰던 중 쓸모가 없는 글이라는 깨닫는 경우가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최근 3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후배의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선배~ 테크니들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던진 말이었겠지만, 가슴이 뜨끔했다. 마지막 기사를 올린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열심히 기사거리를 찾았다. 며칠 전 들었던 인터넷의 중립성에 대한 팟캐스트가 떠올랐다. 색다른 관점을 제시했기에 그걸 기반해서 글을 쓰면 좋겠다 싶었다.

쓰고 다듬고 쓰고 다듬고 오늘로 3일째였다. 헌데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문장은 유려해지는데 알맹이도 결론도 없는 느낌이랄까. 분명 쉽게 읽히는 문장이지만, 내용을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딴짓을 하며 구글링을 하다가 사이다 같은 글을 발견했다.

글을 씀에 있어 가장 하수는 기반지식도 얕은 주제에 뭐라도 써보려고 하니 시작도 전에 실패의 길로 들어가는 경우이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알맹이는 없으면서 강한 단정과 때론 욕설로 무장한 글을 싸지르게 된다. 중수는 어줍잖게 알고 있는 내용들은 있으나 잘 풀어내지 못하여 크게 마음에 와닿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또 글에 언급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마구 뒤섞인 조각들이 분량초과로 실격패를 가져온다. 피자 1한판을 만들거면 딱 원형에 맞게 8조각만 모아야지.

같잖은 실력으로 인터넷에 글을 쓰다보면 생기는 병폐

다시 기사거리부터 찾아야겠다. 고수는 요원하고, 중수를 바라보자.

 

이미지 출처: http://rappingmanual.com/3-remedies-for-curing-your-writers-bl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