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짧은생각

격렬히 참는다는 것

시사인에 사교육 없는 양육법에 대한 글이 실렸다. 능률교육 대표를 거쳐 웅진씽크빅 대표를 하고 있는 분의 양육법이 흥미롭다.

아내는 동창회에 갈 때마다 “넌 한 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대학에 척척 붙느냐?” 하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내게 하소연했다. “왜 한 일이 없다고들 하지? 나도 간섭하고 싶은 것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걔들이 알기나 할까?” 하면서. 아이들을 쫓아다니면서 키우는 것만큼이나 “네가 알아서 해” 하고 지켜보는 것도 속이 타는 일이다. 남들 보기엔 아무 일도 안 한 것 같지만 실은 참느라 격렬하게 애쓴 것이다.

인상적인 마지막 문장.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게 더 힘들 수 있다.

알아주는 사람, 기쁘게 해주는 사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목숨을 바침),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꾸민다.”

士 爲知己者 死, 女 爲說己者 容 (사 위지기자 사, 여 위열기자 용)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 5인의 협객(俠客) 중 ‘예양(豫讓)’편>

딱 봐도 찾기 어려워 보이지 않는가?

동성애자와 무교의 대화

필리핀 전화영어 선생님이 처음 한국에 왔다. 홍대에서 만난 그녀 옆에는 필리핀에서 함께 온 게이 친구가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는 동성애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엄격한 카톨릭 국가라 뜻밖이었다.
그들은 나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종교가 없는 사람은 방탕하고 막 사는 사람이라 여긴다한다.
상식이나 믿음이 실제로는 고정관념이나 고집일 수 있다.

슬픈 존재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의 혐오와 폭력을 유발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피해나 괴로움을 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슬픈 운명을 타고난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면 되는 걸까. 벽에 점잖게 붙어있는 나방을 잡으며 혼란스러움이 밀려든다.

무지

주말은 시사인과 신문을 읽는 시간이다. 시사인을 읽던 중 인상적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물고기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 자기만의 문제인지, 다른 이들도 아픈지 궁금해서 큰 물고기에게 물었다. “물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큰 물고기가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물이 뭐냐?

개념을 인식조차 못 하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달달한 게 땡기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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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과연 커리어를 제외하면 내 삶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거대한 질문에 정신과 육체 모두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심지어는 밥맛이 없어진 탓에 점심을 제끼려고 했었다. 다행히도 꾸역꾸역 따라가서 먹은 물회의 새콤달콤함이 기분을 좀 풀어주긴 했지만.

그리하여 지난 며칠간 자신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고, 적어도 몇 가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나는 커리어에 관해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미명 아래,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커리어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혹여나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기라도 하면, 불쑥불쑥 커리어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나를 휘감았다. 인생 전체로 놓고 본다면, 커리어는 두개 내지 세 개 정도의 큰 축에 불과할 텐데, 그것만을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는 게 서글프다.

또 생각보다 나를 중심에 놓고 살고 있었다. 일상에서 지키고 싶은 반복적인 부분을 정해두고, 다른 사람이 그 영역을 침범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 오히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소중한 사람을 바깥으로 스스로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지키려고 한 걸 항상 지키는 것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온갖 예외를 들이대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종합해보면 내 일상을 오롯이 내가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한 걸로 보이는데, 이게 맞는 건지는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는 주변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경향이 있었다. 가능하면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고, 궁상맞음과 찌질함은 안으로 숨기고 싶어 한다. 잘 하는 건 열심히 드러내놓고 하지만, 잘 못 하는 건 가급적이면 안 하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면서, 특히나 다양성 영화를 더 높이 평가하고, 챙겨보는 이유 중에는 꽤나 으스대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하소연을 가장한 교묘한 자랑, 또는 “내가 이렇게 정말 너무 힘들단다” 류의 페이스북 포스팅에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도, 나 역시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렸을 때 얼마나 반응이 일어날까 궁금해 하며 들락날락한다. 기대만큼 반응이 일어나지 않은 때에는 괜스레 상심하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위안을 받으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자는 이야기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야기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커리어가, 명함이 사라진다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나만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스스로를 중심으로 놓고 다른 사람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주변 사람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모순적인 기질은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평생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인 질문에 답을 하고 있자니 달달한 게 땡긴다. 귤이나 한 접시 까먹어야겠다. 손톱 밑이 노래지도록 까먹어야겠다.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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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가 바로 집 근처 공원을 30분 정도 걷기이다. 이때 걷기는 이동수단으로서의 걷기라기보다, 나 자신과의 대화수단으로서의 걷기이다. 배에 힘을 똬 주고, 가슴을 쫙 펴고 한 걸음 한 걸음 음미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걸 시작한 계기는 걸으면 스트레스 지수가 내려가는 등 전반적인 컨디션이 좋아진다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부터다. 그 즈음에 여러 생각들이 똬리를 튼 뱀처럼 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몸이 점점 안 좋아진다는 걸 느끼고 있던 차였다. 뭐라도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다큐멘터리를 보자마자 밖으로 나섰고, 그 이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꼭 실천하려고 한다.

걷는 중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들락날락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공원과의 추억이었다. 어느덧 10년 넘게 살고 있는 집으로부터 5분 정도로 가까운 위치지만, 자주 들르지는 않았다. 가장 열심히 들렀던 때는 바로 군대 해결할까였다. 대한민국 남자 대부분이 그러하듯,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편한 곳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알아봤다. 육군이나 해군에 있던 친구들로부터 들은 군대 이야기는 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곳일까 싶은 그런 곳이었다. 카투사는 이미 추첨에서 탈락했고, 꼼짝할 도리가 없구나 절망하던 중 아는 형이 의무소방이라는 걸 알려줬다. 서울 안에 있는 소방서에서 좀 더 편하게 군 생활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끌렸다.

의무소방은 필기시험과 체력 시험으로 이뤄졌는데, 내 걱정은 사실 하나였었다. 체력 시험 과목 중 오래달리기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필기시험은 당연히 통과할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문제는 초중고 다니면서 오래달리기는 늘 꼴찌에서 세는 게 빨랐던 나였다. 그래서 매일 공원을 몇 바퀴씩 뛰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다 걷다를 반복하면 더 효과가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다. 덕분에 체력 시험은 통과했지만, 오히려 필기시험에서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지원한 의무소방 시험에서 불합격 통지를 확인한 그날, 나는 부끄럽게도 친구 앞에서 울었다.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구나. 이제 나를 기다리는 건 지옥 같은 군 생활이구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그렇게 울었다.

지옥일까 걱정했던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훈련소가 끝나고 부대 배치 받던 날에도, 아무런 근거 없이 서울로 배치 받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서울이 아니었다. 사실 그때 기분은 절망적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사실 괜찮았다. 부대 환경도 좋고, 사람들도 나름 괜찮은, 곧 전역하는 선임들이 많은 부대에 배정되었다. 2년을 꾹 참고 견디다보니 어느덧 전역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렇게 호들갑 떨었던 군 생활에 대한 걱정은, 사실 별거 아닌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는 걸. 물론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안 하겠지만 말이다.

공원을 걷는 도중 10년 전 헉헉대며 뛰어다니던 모습을 떠오르면 큭큭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걱정에 사로잡혀 열심히 달렸었다. 결국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머리가 복잡할 때면, 스스로에게 알려주곤 한다. 지금 고민들이 어떻게 풀지 알 수 없는 것들이지만, 적어도 확실한건 세상을 끝장내는 고민들은 아니라고 말이다. 설사 명쾌한 답을 구하지 못할지라도, 인생은 계속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런 생각들과 함께 오늘도 나는 공원으로 향할 준비를 한다.

쓰지 못해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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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에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꼭 글을 쓰고 마리라. 일주일에 적어도 두 편은 쓰자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약간의 압박을 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끈지끈거리며 흠뻑 물기를 빨아들인 스펀지처럼 답답하게 축 쳐진 머리를 산뜻하게 바꾸고 싶었다. 글을 쏟아낸다면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어떤 글을 써야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작은 팔다리를 흔들어대지만, 그 팔다리를 잡아 끌어주는 사람이 없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단어가 혀 끝에서 뻗어나오지 못하고 맴도는 놀라운 느낌이, 요즘은 머리 속에서도 나오지 못하는 느낌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진화가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향하는 건 아닌가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모장을 열어본다. 평소에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들을 모아두는 공간을 살펴보면 괜찮은 글감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몇 개를 살펴보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필경 그때는 괜찮다고 생각해서 끄적였을 텐데, 어떻게 이어나가야할지 잘 모르겠다. 머리가 더 지끈지끈 아파온다.

이쯤에서 인정해야겠다. 오늘은 쓰지 못해서 쓰는 글과 만나는 날이었음을. 막상 읽어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다. 발악하지 않고 담담하게 정리된 느낌이 좋다. 내 자신과 똑바로 마주서서 오롯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쓰지 못해서 쓰는 글에서 “쓴맛”이 아니라 약간은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면 오해일까.

뜬금없는 2년 전 몽골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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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옆 책꽂이에는 수첩 몇 권이 꽂혀있다. 일기를 쓰겠다고, 읽은 책에 대해 기록하겠다고 구입한 것도 있고, 어디선가 받아서 연습장처럼 사용하는 수첩도 있다. 그 중 몇 개를 꺼내 새로운 용도를 모색하던 중, 2년 전 몽골 여행 중 썼던 글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 그때 나는 몽골에 갔었다. 어떻게 하다가 행선지를 몽골로 정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행이 참 인상적이었던 건 아직도 기억난다.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과 수첩 속에서 묘사된 기억들을 버무려 아주 뒤늦은 몽골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여행이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혹은 계획을 세울 수 없이) 울란바토르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 항공편 일정에 맞는 투어 프로그램을 고른다. 몇 박 몇 일 고비 사막, 몇 박 몇 일 초원, 몇 박 몇 일 테를지 공원 등의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듣고, 게스트하우스에 있거나 들른 사람들끼리 팀을 짠다. 내가 고른 프로그램은 한국인 2명, 일본인 2명, 태국인 1명으로 보기 드물게 아시아인끼리 뭉쳤는데, 심지어 나머지 한국인 1명은 고등학교 선배였다.

투어 가이드와 운전기사가 90년도에 나온 현대 봉고를 몰고 숙소 앞에서 기다린다. 울란바토르를 벗어나서 하루에 8시간씩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가, 가이드가 만들어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몽골 전통 천막인 게르에서 매일 밤을 보낸다. 네비게이션은 물론 지도조차 없는 상황에서 머리 속 길을 냅다 달리는 운전기사를 보면서 경이로움을 여러 차례 느꼈다.

초원과 지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주변에 그 누구도 살고 있지 않는 곳이라 화장실도 없다. 그냥 적당한 곳에 가서 적당한 방법으로 볼일을 처리하면 되는 법. 볼일을 보고 있으면, 우주의 모든 기운이 나에게 모이는 느낌이다. 샤워 시설과 물도 없어서 물티슈로 몇 일 동안 물티슈로 얼굴과 머리를 닦다보니 찝찝한 게 흠이다.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밤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이 떠있다. 별똥별은 5분마다 하나씩 떨어지고, 너무 많은 별들 사이에서 북두칠성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광량을 높이려 휴대폰을 들고 몇차례 주위를 뛰어다니던 형 덕분에 위에 있는 멋진 사진이 탄생했다.

한국 돈으로 5천원 정도를 내면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릴 수 있다. 용기를 내어 말의 속도를 올리면 어느 순간 말의 네다리가 공중에 떠있는 순간과 마주하는데, 정말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이다.

한 가지 조심해야할 점은 몽골 사람은 술을 정말 잘 마신다. 한국 사람 술 잘 마신다면서 보드카를 계속해서 들이마시다가, 다음 날 한 8번은 토한 기억이 있다. 속에 들은 게 없으니 마지막에는 계속 초록물이 나오더라. 그 상태로 누워 봉고차로 8시간 동안 꼼짝 못하고 있었다.

죽도록 고생했지만, 죽을 때까지 기억날 것 같은 그 곳 몽골. 떠있는 별을 손가락으로도 샐 수 있을 것 같은 서울의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리워진다. 경이롭고 비현실적인 느낌들.

타인의 개꿈 속 주연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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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쯤 전이었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니 맞은편 자리의 동료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어젯밤 그녀의 꿈에 내가 ‘또’ 나타났었다고. 또 라고 강조한건, 한 주 전에도 꿈에 나타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주변 사람이 등장하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이렇게 연달아 등장하는 경우는 또 드물어서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어떤 꿈이었냐고.

동료가 전해준 꿈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길을 가던 중에 나와 마주쳤다고 한다. 나는 어떤 여자와 데이트 중 이었다. 데이트녀는 굉장한 몸매의 소유자란다. 어허. 심지어 데이트녀가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했지만, 나는 동료에게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호라. 흥미로웠다.

꿈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꿈에서 내가 동료에게 9월 중에 중대한 발표를 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중대한 발표라고? ‘중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라면 요즘 시기에는 몇 가지 선택지 안에서 후보를 고를 수 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해당되는 게 없었다.

우리는 곧 합의에 이르렀다. 어젯밤 동료의 꿈이 개꿈이라는 사실에 합의했다. 아쉬웠다. 내가 주연 배우를 맡았던 동료의 꿈이 개꿈이라는 게. 가능하면 작품성 높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게 배우들의 욕심이 아닐까. 하지만 어젯밤 꿈은 영화 “클레멘타인”에 버금가는 작품성을 지닌 영화였다.

어느덧 그녀의 꿈이 점찍어둔 9월이 코앞이다. 꿈의 내용과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9월은 좀 특별한 시기일거라는 느낌이 온다. 아니 특별해야한다. 가을 밤의 망작이 아닌,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쥔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대한 발표의 후보 선택지는 이번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시간이 흘러 돌이켜봤을 때 2015년 9월이 중대한 시기로 남길 바란다.

나의 9월은 “인사이드 아웃” 일까 혹은 “클레멘타인”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