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짧은생각

알아서 잘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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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미용실을 찾는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일단 마음에 드는 선생님을 만나기 쉽지 않다. “알아서 잘라주세요” 라고 말해도 알아서 마음에 드는 머리 스타일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잘 없다. 믿음이 가는 선생님을 알게 되어도 문제는 남아있다. 어느 날 가보면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대체로 주된 활동 반경 내에 속한 미용실을 가기에 그 선생님이 내 영역이 아닌 곳으로 옮기면 다시 새로운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해야한다.

친구가 소개해준 미용실에 다니던 작년 이맘 때 쯤 이었다. 옆머리를 눌러주는 다운 펌을 커트와 함께 저렴한 가격에 해주는 미용실이었다. 거기서 친구가 소개해준 선생님에게 몇 달 째 머리를 맡겼는데, 몇 번 가고나니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한창 머리를 자르던 중, 어쩌다 나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선생님이 물었다. 자기가 몇 살 같아 보이냐고 .

또래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익힌 처세술을 써먹을 때였다. 상대방의 나이를 짐작하여 이야기할 때는 약간 낮은 숫자를 부르는 게 좋다.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일단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나보다 누나라는 걸 확신했다. 일을 시작한지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말했던 적도 있으니 결론은 쉬웠다. 나보다 한 2살 정도는 많겠구나. 그러면 2살 정도 낮춰서 나랑 동갑 정도로 답하는 게 좋겠군. 진심을 담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30?”

표정이 이상하다. 활짝 웃으면서 그것보다는 많다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다. 슬그머니 불안감이 감돈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선생님이 대답한다. 그거보다 2살 어리다고. “아 그렇구나…”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요정도 뿐이었다. 알고 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내 친구도, 심지어 미용실 보조 선생님도 선생님의 나이가 그럴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런 불의의 사건이 있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 선생님을 찾았다. 시간이 흘러 선생님은 승진했고, 오늘 그 미용실에서는 처음으로 펌을 했다. 펌을 하고 나면 어색하지 않을까 망설이는 나를 강하게 안심시키는 모습에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괜찮았고, 머리를 세팅해주면서 잘 어울린다며 선생님은 환하게 웃었다. 정말 걱정 없이 그냥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외모와 실력을 맞바꾼 우리 선생님을.

섹시한 남자

ImTooSexy-36274섹시한 남자가 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너무 큰 소리로 웃지는 않으면 좋겠다. 섹시하다는 이야기를 태어나서 몇 번 들은 적 없고, 섹시와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래도 난 섹시한 남자가 되고 싶다. 운이 좋다면 모르고 있던 섹시함이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난 본디부터 섹시한 남자였던거다!

무 자르듯 딱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크게 두 종류의 섹시한 남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그냥 겉으로 보기에도 섹시한 남자다. 얼굴, 몸, 행동에서 뚝뚝 떨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대표적으로 부러운 사람은 박재범이다. 그의 찢어진 눈은 날카로운 느낌을 주고, 묘하게 매력적이다. 작은 키지만 비율이 좋고, 운동과 춤으로 다져진 몸이 괜찮다. 그리고 몸짓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내 여건은 상당히 불리하다. 짙은 쌍꺼풀을 가진 눈이 이쁘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섹시함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웃을 때는 아이처럼 낄낄대고 웃다보니 진중한 맛도 없다. 게다가 특징적인 나만의 몸짓이 있는데, 주변에서는 이를 제발 하지 말라며 흉내 낼 정도로 느낌이 별로이다. 열심히 운동한 덕분에 자신감 충만한 채 반팔티를 입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얼른 긴팔의 계절이 오길 바라는 몸뚱아리를 갖고 있다. 겉보기에도 섹시함을 뿜어내기는 매우 어렵다.

두 번째는 일을 할 때 섹시함이 느껴지는 유형이다. 평소에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 열중하는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Zion.T가 그런 유형이다. 무한도전 가요제를 준비하면서 파트너였던 하하는 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말 못생겼지만 노래만 부르면 정우성” 실제로 노래로 만나는 그는 같은 남자에게도 섹시함을 느끼게 한다.

나도 일 열심히 한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상황을 아주 단순 명쾌하게 풀어내고 나면 “오 나 좀 괜찮은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때가 일하면서 섹시함이 한껏 발산되는 시점이다. 아쉽게도 그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회사 사람들이다. “마리텔”처럼 회사 밖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 한, 나의 섹시한 순간을 널리 알릴 방법은 없다. 일에 열중하는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섹시함을 보여주기 어렵다.

다시 태어나자. 그게 더 빠르겠다.

진실은 겹겹이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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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화 생활에 대한 정보를 얻는 주된 방법은 일주일에 한번씩 집으로 오는 잡지와 신문으로 좁혀졌다. 지난 주말 신문을 읽던 중, 흥미로운 소개 기사를 접했다. “왕세자 실종사건”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던 뮤지컬이 8월 중에 잠깐동안 공연된다는 기사였다. 확하는 끌림이 이어져서일까, 곧바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다행히 괜찮은 자리가 하나 남아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뮤지컬과 만났다.
비디오 테이프의 되감기 같은 연출로 같은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망해나가면서 거대한 진실의 중앙부로 나아가는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애써 못 본체 하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춰서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모습 또한 일품이었다.
스스로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정작 알고 있는 진실은 한쪽 면에서만 보이는 모습인 경우가 종종 있다. 한겹 한겹 껍질을 벗겨낼 때마다,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지만 정작 내가 알던 것과 달라서 부정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한발짝 더 다가온 진실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서리친다.
내가 알고 있는게 과연 진짜일까 자신이 없어진다. 그때 그 일은, 그 사람은 정말 그랬던건지 잘 모르겠다. 만약에 다른 쪽 면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리고 한겹 벗겨진 진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늘 겸손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하나의 진실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 그거 하나일지도 모른다.

P.S. 누구와 함께 봤는지에 대한 진실은 겹겹이 쌓여있지 않다. 경험하고 싶은게 있으면 혼자여도 부담스럽지 않다. 분명 이 글을 읽은 누군가 물어볼 법한 질문이기에 미리 답한다.

개똥철학에서 개똥벌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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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를 하나 내보겠다. 누구나 이것을 갖고 있지만, 가급적이면 가슴 속에 숨겨놓고 있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장소는 술자리이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몸속을 따뜻하게 휘감은 술이 용기를 불어넣는다. 저 깊은 곳에서 꿈틀꿈틀 움직임이 느껴진다. 나올랑 말랑 나올랑 말랑. 말할까 말까 고민도 잠시, 술기운을 빌려서 남들 앞에 꺼내놓는다. 나의 개똥철학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나에게는 개똥철학이 몇 가지 있다. “개똥”이라는 단어에서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흔히 개똥은 값어치가 낮거나, 쓸모가 없는 것을 일컬을 때 사용된다. 속담 중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가 아주 정확한 예시이다. 나에게는 삶의 금과옥조와 같은 신념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게 들리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몇몇에게 들려주었을 때, 좋은 반응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욕을 안 먹으면 다행이다. 그러다 간혹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어깨를 살짝 두드리기도 한다. 역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신이 난 채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해본다. 그러다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꽤 만날 수 있다.

시작부터 모든 사람의 지지와 환호를 받는 생각은 거의 없다. 소싯적 위인전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이 하나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발견을 하거나,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비난과 역경을 거쳤다. 심지어는 본인이 죽고 난 후에야 인정받은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개똥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개똥철학은 개똥벌레가 되었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내 아이디어가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보석이 될 수 있다. 아이디어를 알리지 않는다면, 개똥철학은 개똥철학에서 변하지 않는다. 말하자, 적자, 그리자, 널리 알리자. 그러다보면 이 넓은 세상에서 나와 공명할 적어도 하나의 사람은 찾을 거라 믿는다.

“열심히” 보단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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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챠”라는 앱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영화에 대한 평가결과를 토대로 알맞은 영화를 추천해주거나 얼마나 좋아할지를 알려준다.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라 그간 어떤 영화를 봤었는지 기록하는 용도와 새로 나온 영화를 선택할 때 정보를 얻거나 추천을 받으려는 목적에 즐겨 써왔다. 그리고 앱이 상당히 잘 만들어져 있어서, 업무를 하면서도 여러모로 자주 살펴보던 앱이었다.

그런 왓챠가 지난 주 나의 큰 화두였다. “왓챠 3.0″이라는 기치로 대대적인 업데이트를 진행했는데, 사용자들의 맹비난과 마주한 것이다. 아이폰 사용자들의 평가는 그나마 점잖지만, 안드로이드폰 사용자들의 평가는 말 그대로 살벌하다. 만약 내가 앱 담당자였더라면, 악평이 무서워서 앱 스토어에 들어가지 못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왓챠를 만든 회사에 아는 사람은 없지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왓챠는 어떻게 해서 사용자의 마음을 잃은 것일까.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늦게 퇴근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용자들에게 공개하기로 한 목표 일자가 다가올 수록 걱정과 불안도 컸겠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을 거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결과물을 빨리 보여줘야지 라는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사용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기획자/디자이너/개발자 모두가 합심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욕만 먹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사용자가 생각하는 왓챠의 핵심과 왓챠에서 정의한 핵심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번 업데이트에서 가장 큰 비난을 사고 있는 요소는 드라마와 책에 대한 평가/추천 시스템 도입이다. “영화”라는 서비스 핵심 속성이 흔들리면서 산만해졌다는 의견이 비판의 주를 이룬다. 왓챠에서는 스스로의 핵심을 “평가와 추천”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영화인지 드라마 혹은 책인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왓챠에서 스스로를 정의한 “평가와 추천”이라는 핵심 대신 ,사용자들이 느끼는 “영화”라는 핵심에 좀 더 신경 썼어야했다.

사실 이유 없는 결정은 거의 없다. 남이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 안 되고, 한심하다 생각되는 내용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 처음에는 왓챠에서도 스스로의 핵심을 “영화”로 정의했었지만, 더이상 영화 시간표/예매 시스템을 제공할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 사업적인 고민 때문에 다른 영역으로의 서비스 확대라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잘 하는게 중요하다. 열심히 준비해서 만들어낸 변화에 무조건 박수를 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잘 만들어진 변화에 환호성을 지르는 대다수의 사람이 있을 뿐. 왓챠 팀이 마음 잘 추스리고, 다시 사용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왓챠를 비판하기위해 이 글을 쓴게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힙니다. 전 왓챠의 팬이고,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길 기원합니다*

제 머리를 “제대로” 깎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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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 상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평일을 보내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퇴근 후 약속이 늘었다는 점이다.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인건 변함 없지만, 이전에는 늦게 퇴근하는게 기본이라 퇴근 후 약속 잡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저녁 이후 시간이 내 것인듯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시절과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해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약속이 많이 생겼다.

약속이 많아진다는건 곧 점점 얇아지는 지갑,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엿보고 있는 술 배와 연결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또한 늘어나고 있다. 만나는 이 중에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으나 자주 보지는 못했던 이도 있고, 최근에야 인연을 맺게된 이도 있다. 만남의 시작과 과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반가움은 같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통찰력 넘치는 절묘한 선언이다. 나 또한 그렇지만, 마주 앉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삶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덤덤한 표정으로 현재 주된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통을 잠시 잊게해줄 술이 앞에 놓여있다. 짠 하고 잔이 부딪힌다. 술술 넘어간다.

이제 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방금 들려준 고민에 대해 이리저리 분석하고 나름의 조언을 던진다. 상대방의 사정을 100%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도 상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의 조각을 이어 붙인다. 이어 붙이다보니 그럴 듯한 말들이 짜여진다. 슬쩍 살피니 얼굴이 조금은 환해진 것도 같다. 연신 고개도 끄덕끄덕거린다. “역시 난 통찰력 있어” 더 신나서 이야기한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분명 마주 앉은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 스스로에게 던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조언들이었다. 내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나와는 상관 없는 듯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면서 정작 나 자신은 별다른 변화나 노력없이 지금처럼 계속 살려는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의식적으로 옆에 밀어둔채 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중이 되기는 싫다. 다른 사람의 머리를 깎아주기 전에, 내 머리부터 먼저 깎고 싶다. 아니 내 머리는 물론 다른 사람의 머리도 깎는 그런 중이 되고 싶다. “제대로” 깎는 중 말이다.

취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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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라는 단어처럼 가벼우면서 동시에 무거움을 주는 단어도 잘 없는 것 같다. 경쾌한 발걸음이 옮겨질 듯한 이 단어가 특정한 뒷문장과 합쳐지면 마법처럼 짓누르는 무거움을 주기 시작한다. “취미가 뭐에요?” 라는 문장으로 바뀌면 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져온 숙명적인 과제이다. 스스로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에서 당당하고 말 끝을 흐리지 않고 자신의 취미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죽하면 자기소개서 중 가장 어려운 질문이 “특기”와 “취미”라는 말까지 들리겠는가.
그러다보니 취미를 가져본다, 취미로 할만한거를 찾는다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건 “똑똑한 바보”처럼 모순의 극치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시간이 생길 때마다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를, 일부러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니! 일처럼 되어버린 취미가 과연 취미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취미라고 답하는 독서나 음악 감상을 자신의 취미라고 밝히기는 싫은걸까. 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걸 취미라고 말해야하는걸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쓰여서일까. 혹은 남다른 취향을 갖기 어려운 사회라서일까.
그냥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특별히 좋아하는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딱히 없다고 말하면 좋겠다. 누군가 독특한 취미를 이야기한다면 그저 존중해주면 좋겠다. 취미는 사랑이라고 노래 부르는 사람도 있다.
취미에는 높고 낮음이 있는게 아니다. 취향과 즐거움만 있는거다.

어느 밤

불면증

어김없이 돌아왔다. 이제는 반쯤 포기 상태이다. 온갖 수를 써봤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유난히 길 것만 같은 밤이다. 하루는 24시간으로 똑같고,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으로 다가서는 이 밤은 유난히 길다.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질 않는다. 마땅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일이 몇 번 계속 되다보니 잠자리를 준비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잠이 안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은 다르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눕는다. 어김없이 잠이 안 온다. 자야지 자야지 마음 속으로 되내인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진다. 희한한 일이다.

잠 못 이룰 것이 확실한 일요일 밤. 너와 마주하고 있다. 오늘만큼은 나를 편하게 놓아준다면 고맙겠다. 헛된 기대와 함께 악수를 청한다. 잡은 손의 느낌이 그리 썩 좋지는 않다.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이 밤.

잠 못 이루는 일요일 밤의 좋은 점이 있다. 한 주를 알차게 보내겠다는 다짐이 무너져도 변명거리가 생긴다는 점. 일요일 밤에 일찍 못 자서, 월요일부터 단추를 잘 못 꿰었다는 핑계. 어쩌면 그럴싸한 핑계를 미리 만들어 놓기 위해 내 몸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평양냉면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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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내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과연 무엇을 먹을 거냐고 질문을 던지곤 한다. 가장 좋아하거나 그리워하는 음식을 좀 더 또렷하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이 질문을 받는 사람은 당황하기 일쑤이다. 평소에는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소중한 존재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니까. 만약 나에게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평양냉면이라고 답하겠다.

처음부터 평양냉면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면발의 미덕은 쫄깃함이라고 생각했기에 이에 닿자마자 후두둑 끊어지는 면발이 참으로 어색했다. 그뿐인가. 싱겁기 그지없는 육수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애호가들이 거치는 이런 통과의례를 지나, 이내 평양냉면의 면발과 육수를 탐닉하게 되었다. 과하게 쫄깃거려 어떤 때는 부담스러운 함흥냉면의 면발과 달리 훨씬 부드럽고 입에 달라붙는다. 싱겁기만 하던 육수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찾아서 그릇을 붙잡고 기울인다.

평양냉면 잘한다고 소문난 가게들을 여러군데 가봤지만, 가장 좋아하는 곳은 봉피양이다. 맛도 훌륭하고 냉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묵직한 놋그릇도 좋다. 나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짠돌이로 소문난 아버지도 한그릇에 14000원 정도 하는 비싸다면 비싼 봉피양 냉면을 좋아라하신다. 거기를 갈 때면 한 그릇 뚝딱 비우시고는, 여기 냉면은 이 가격 내고 먹을만하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신다.

함경도가 고향인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원래 냉면은 겨울에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 추운 겨울날, 따뜻한 방 안에서 차가운 냉면 한 그릇 비워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고. 하기야 그 시절에 차가운 음식을 만들려면 겨울철 찬 공기를 이용하는 방법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겠지 싶었지만 들으면서 신기했다. 말 그대로 이한치한이 아닌가.

입에 침이 고인다. 점심에 먹었는데 또 먹고 싶다. 스피노자는 내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했다. 그런 허세는 싫다. 그냥 먹고 싶은 거 먹고 이 세상을 뜨겠다. 내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봉피양에 들려 평양냉면 한 그릇 뚝딱 해치우겠다. 세상의 종말이 조금이라도 덜 아쉬워지게 말이다.

기억을 담는 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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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 사람과 자주 들렀던 식당이 있다.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처럼 따뜻하고, 밝고 포근한 색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러다 그 사람과 더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식당을 지날 때면 마음이 쇠잔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쳐다보기 싫어 그쪽으로 향하는 눈길을 돌리려 애를 썼다. 그 곳의 색과 온도도 달라진다. 어느 순간 짙고 어두운 공간에서 차가움이 느껴진다.

사실 식당 그 자체는 예전 그대로이다. 달라진 건 특별했던 사람과의 변화된 관계와 시간. 그로 인해 감정이 바뀌고, 식당에 대한 기억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이런 청승맞은 사례 말고도,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재앙과 같았던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이 아름다운 결말에서는 근사한 시작으로 변하기도 하고, 죽을 듯이 힘들었던 시절이 돌아보면 보약이었던 경우도 있다.

이렇게 보면 기억은 얼음처럼 딱딱하게 모양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또 기억은 증발하지 않는다. 사라진줄 알았지만 다시 눈에 들어온다. 결국 그때그때 기억을 담은 감정이라는 컵의 온도와 색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본래의 색과 온도보다 뜨겁게 혹은 차갑게, 밝게 또는 어둡게 변한다. 그렇다고 그 기억의 본질이 변한 건 없다. 그걸 해석하는 내가 달라졌을뿐. 어쩌면 기억은 기록이라기 보다는 감정의 해석이니까.

하나의 기억 조각은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색과 온도를 가질 수 있다. 기뻤지만 슬프고, 화가 났지만 위로가 되었던 그런 기억도 있는 법. 하루 한해 세월이 지날 수록 이렇게 복합적인 기억들이 점점 많아진다. 선과 악 두가지로 무 자르듯 구분되는 세상이 아니듯, 기억의 색과 온도 역시도 모 아니면 도로 변하지 않는다.

잿빛 기억은 어떻게든 밝고 따듯한 컵에 담으려고 노력해야하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요한건 그 기억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와 침착함으로 가능한 오래 꼭 안아주는 거다.  그 기억 조각들을 오래오래 끌어안고 있으면, 밝고 따뜻하게 변한 조각의 부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더 성숙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