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

“쓸모없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는 것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넓은 황야를 걸어간다고 하자. 땅은 더없이 넓고 크지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딛는 부분일 뿐이다. 나머지 부분은 직접적으로 필요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 없는 부분을 파버린다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 발 딛는 부분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래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겠는가? 쓸모 있는 것이 쓸모 있으려면 쓸모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중 장자의 말을 풀어서

발을 어디에 딛느냐에 따라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이 달라진다. 길을 나서기 전부터 딛고 갈 곳이 명확하고, 그대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 시점에는 처음 생각했던 쓸모 있음과 없음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

스티브 잡스의 “점을 연결하다”는 비유보다 더 멋지고 직관적인 비유이다.

2호선 지하철 기록지

가장 좋아하는 교통수단을 뽑으라면 나는 지하철을 뽑을 거다. 도착시간을 어느정도 예상 가능하다는 점이 정말 좋다. 서울 서쪽에 사는 나로서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고서는 버스, 택시, 자가용을 이용했을 때 도착 시간을 예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

하지만 어제 탄 2호선은 정말 역대급이었다. 그 칸에 큰 소리로 전화하는 사람이 무려 세명이 있었다. 한 명은 통화 상대방에게 쌍욕을 퍼붓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휴대폰을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화 속 건너편 남자 친구에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통화하면서 가만히 서있지도 않고, 계속 돌아다녔다.

승객이 꽤 많았던 시간대에 운 좋게 자리에 앉았음에도 심각하게 다른 칸으로 옮길까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한 명 한 명씩 내리기 시작하더니 중간쯤 되자 세명 다 내리면서 지하철에 평화가 찾아왔다. 도대체 지하철에서 큰 소리롤 통화하는 사람의 정신상태는 무엇일지 혼자 씩씩 거리면서 고민하다가, 문득 3년 전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이전 회사 동료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 들은 바로 그날이었다. 이 소식을 그 회사에서 친하게 지냈던 후배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회식에서 술을 몇잔 걸친 나는 급한 마음에 지하철에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기운이 온 몸을 감싸고 있던 그때, 나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끄러운 것은 내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왜인지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대급 지하철을 겪고 나니 다시 한번 그때 내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3년 전 어느 날, 영등포구청역 방향으로 가는 2호선을 타고 계셨던 승객 분들, 일일이 찾아뵐 수가 없기에, 이 글로 심각한 사과를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때는 모자랐습니다

토스트마스터즈에 가다 (Toastmasters)

아직 새해 뽕이 가시지 않은 요즘, 작년과 다른 해를 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그중에 테마로 정한 것 중 하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자는 거다.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면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고, 그러다 보니 작년에는 집, 회사, 옛날 친구 이렇게만 만났었다. 올해는 달라지리라 결심 후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보다가, 토스트마스터즈 모임에 나가기로 했다.

스트마스터즈는(Toastmasters) 전 세계적인 비영리단체로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영어 발표를 하는 모임이다. 단순한 영어회화 스터디와는 다르게, 나름의 체계와 커리큘럼을 갖고 있다. 이전에도 몇 번 참가해봤었는데, 평일 저녁에 하는 모임이었어서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나로서는 꾸준하게 나가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그동안 눈여겨보던 토요일 아침 모임을 참가하기로 해보았다.

각 모임마다 분위기나 구성원의 특징이 다른데, 이번 모임은 평균 연령이 상당히 높았다.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셨다. 이분들의 영어 실력은 다른 모임 대비 조금 뒤떨어져있었다. 하지만 저 나이에도 배움과 노력을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업무를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만 익숙하지, 업무가 아닌 내용을 영어로 이야기하는 건 어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로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영어도 늘릴 수 있고, 토요일 아침을 알차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모임이었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초대손님으로 참석해보고, 완전히 회원으로 등록할지 결정해야겠다. 일단 지금까지의 느낌은 매우 긍정적이다.

독서노트를 시작하다

직접 작성한 첫번째 독서노트 (악필은 덤)

2020년을 며칠 앞둔 지난주 가까스로 이틀 휴가를 냈다. 한주를 통째로 쉬려는 계획은 아쉽게 접어야 했지만, 12월 마지막 이틀을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어디 여행 가기에는 시간이 짧았던지라, 그 의식을 반복하기로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한강을 따라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바로 그 의식 말이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점심 먹고 카페 가서 생각을 노트에 흐트러놓고, 다시 나와서 마저 걸었다. 물론 이렇게 걷는다고 엉킨 생각이 전부 깔끔하게 풀리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오롯이 생각에 파묻혀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개운함이 온몸을 감싼다. 그래서 나는 답답할 때면 한강을 간다.

이번에 주로 생각한 내용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비슷한 나이이지만 더 깊이 생각할 줄 알고, 더 나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람들처럼 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 방법으로 독서노트를 쓰기로 결심했다.

한주에 한 권 이상 책을 읽고 있지만, 정작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읽으면서 내 관점과 비교해보거나 소화시키려는 노력을 특별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좋은 내용이더라도 삶에 적용하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던 중 독서노트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새해 처음 읽은 책을 갖고 독서노트를 시작해보았다. 뭐든 하려고 하면 장비부터 구비하는 나답게 이것저것 구입했다. 책에 밑줄 긋지 않고도 인상 깊은 문장을 표시하기 위해서 포스트잇 분류용 필름을 샀고, 이를 책과 함께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자석 책갈피도 주문했다. 또한 윗글에서 추천해준 것처럼 A5 노트와 삼색 볼펜도 마련했다.

그렇게 해서 독서노트를 실제로 해보니 이전 독서와 확실히 달랐다. 문장을 표시하고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해보다 보니 독서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표시한 문장 중 옮겨 적을 문장을 추리기 위해 한 번씩 다시 읽다 보니 책을 두 번 읽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문장을 옮겨적고 생각을 덧붙이면서 나만의 관점으로 한번 더 소화하게 된다.

물론 단점도 있다. 예전보다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고, 포스트잇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책을 펼 때 부담감이 올라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득이 더 많은 거 같아서 꾸준히 5권 정도 해볼 생각이다. 독서노트로 인해 달라질 2020년을 기대해본다. 아직 새해 초반이니 새해 뽕 좀 받아보자!

2019년 연말결산

출처: 뉴스픽

기억에 남는 일 TOP 3

  • 사마귀
    • 봄 무렵부터 팔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조그만 물집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팔을 넘어 몸통 전체와 목까지 퍼졌는데, 병원을 가보니 편평사마귀라고 했다. 대개는 자연치유되는 질환이고 마음이 급하다면 레이저로 없애면 되는데, 온 몸에 퍼져있다보니 레이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회심의 치료범으로 소화제를 고용량으로 장기복용 시켰는데, 다행히 6달 가량 약을 먹고나서 깨끗이 사라졌다.
  • 동료의 퇴사
    • 작년 말부터 프로젝트를 함께 담당했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퇴사했다. 급기야는 몇개월째 골방에서 같이 지냈던 맷 마저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나를 슬픔으로 몰아갔다. 이전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자신감을 잃었던 내게, 격려와 좋은 충고를 많이 해줬던 친구가 바로 맷이었기에 정말 슬펐었다.
  • 임종체험
    • 유서를 쓰고, 수의도 입고 관에 들어가보는 임종체험을 해봤다. 이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이 몰려오자 내 인생에서 중요한게 무엇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더 명확하게 고민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기억에 남는 지름 TOP 3

  • 후디스 그릭요거트
    • 탄수화물을 제한하면서 균형잡힌 점심 식사를 고민하던 내게 한줄기 빛과 같았던 제품. 귀리 등 견과류를 넣어서 먹으면 물리지 않고 한통을 잘 먹을 수 있고, 특유의 꾸덕꾸덕한 식감도 내게는 딱 알맞았다
  • 실내 스핀바이크
    • 아침 운동으로 달리기와 수영을 시도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조금 더 접근성이 높은 운동을 고민하던 중 발견한 제품. 보통의 실내자전거와는 달리 실제 자전거를 타는 느낌이 나서 지루하지 않게 꾸준히 운동할 수 있었다. 건강을 챙겨준 보물
  • 제로이드 인텐시브 크림 엠디
    • 겨울이 되면서 얼굴이 미칠 것처럼 건조해 고생하던 내게 피부과에서 처방해준 크림. 실비보험 적용받으면 가격 부담이 없고, 보습력과 흡수력이 정말 최고! 여름에도 이 제품을 얇게 발라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기억에 남는 책 TOP 3

  •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 우리나라 역사를 되짚었을 때, 약자가 활용할 수 있는 교훈 등을 잘 정리. 역사를 이렇게 배웠다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만큼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책
  • 아주 작은 습관의 힘
    • 습관을 두개를 조합하고 근본적인 속성을 건드리는 방법을 쓴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
  •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 드디어 읽어본 경영 고전. 만약 어떤 회사의 문제점을 고치기위해 투입된다면 교과서로 삼아야겠다.

2019년에 읽은 책 (총 60권, 시간순)

  • Altered Traits – 4점
  • 바깥은 여름 – 3점
  • 한글자 중국: 중국의 탄생 – 4점
  • 한글자 중국: 중국의 확장 – 3점
  • The Headspace Guide To Meditation and Mindfulness – 4점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3점
  •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 3점
  • 3층 서기실의 암호 – 3점
  • AI Superpowers – 4점
  • 상어와 헤엄치기 – 3점
  •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 – 4점
  • 비트코인현상 블록체인 2.0 – 3점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3점
  • 슬럼프 심리학 – 4점
  • Folding Beijing – 3점
  • 소비의 역사 – 3점
  • 인스파이어드 – 3점
  • 죽여 마땅한 사람들 – 3점
  • 뜻으로 읽는 한국어 사전 – 3점
  • 한국전쟁 – 3점
  • 아몬드 – 4점
  • 초한지 – 4점
  • 마인드셋 – 3점
  • 캐즘 마케팅 – 4점
  • 퇴적공간 – 3점
  • 인구전쟁 2045 – 3점
  • 텅빈 지구 – 3점
  • 글로벌 고령화 위기인가 기회인가 – 3점
  • 더 라스트 걸 – 4점
  • 배드 블러드 – 4점
  •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 – 4점
  • 댄 애리얼리의 부의 감각 – 4점
  • 리딩 – 1점
  •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 5점
  • 포지셔닝 – 5점
  •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 4점
  • 아주 작은 습관의 힘 – 5점
  • 하우스와이프 2.0 – 2점
  • 가만한 나날 – 3점
  • 습관의 힘 – 3점
  • The Wenger Revolution – 4점
  • 혼자 이기지마라 – 3점
  • 익스트림 티밍 – 3점
  • 채공녀 강주룡 – 4점
  • 말이 칼이 될 때 – 2점
  •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 3점
  •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 3점
  • 트렌드코리아 2020 – 3점
  •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 5점
  • 팩트풀니스 – 4점
  • 원 페이지 프로포절 – 2점
  • 표백 – 3점
  • 디지털 미니멀리즘 – 3점
  • 에센셜리즘 – 3점
  • 오늘부터 디제잉 – 4점
  • 이지 디제잉 – 3점
  • 버려지는 디자인, 통과되는 디자인: 편집디자인 – 3점
  • 아틀란티스 중앙유라시아사 – 3점
  •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 3점
  • 언제 할 것인가 – 3점

2018년 영화/문화생활

  • 그린북 – 4.5점
  • 사바사 – 4점
  • 어스 – 0.5점
  • 어벤져스: 엔드게임 – 3점
  • 논 픽션 – 1.5점
  • 기생충 – 4.5점
  • 조커 – 4.5점
  • 메기 – 1.0점
  • 토이 스토리 – 4.5점
  • 어메이징 그레이스 – 0.5점
  • 뮤지컬 영웅
  • 서울시향 마르쿠스 슈텐츠의 합창 교향곡

하루하루 (Day by day)

나는 노래를 들을 때 가사를 잘 못 알아듣는 편이다. 발성과 발음이 정확한 윤종신 같은 가수의 노래면 그나마 괜찮지만, GD처럼 발음이 부정확한 가수의 노래는 정말 하나도 이해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가사의 내용을 이해하고 노래를 좋아하기보다는, 노래 자체가 주는 느낌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듣다가 한 번씩 가사를 읽거나 집중해서 들으면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인지 깨닫게 된다.

어제 유튜브에서 ‘슈가맨’이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가수를 초대해 노래를 듣고 근황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다. 거기에 가수 에즈원이 나왔다. 중학교 시절을 채워준 가수라 반가운 마음에 그들의 라이브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특히 ‘Day by day’를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따라 부를 수도 있을 만큼 대부분의 가사를 아는 노래였는데,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떨림으로 다가왔다.

문을 두드리는 사랑에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충분한 준비가 되지 못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가사이다. 그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어떻게 저렇게 감각적으로 표현하는지 부럽다. 심지어 토크 영상을 보니, 애즈원은 한국말이 서툰 재미교포들이라 가사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느낌만 간직한 채 불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을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감정이 담겨있었다니 대단한 실력이다.

이렇게 울림이 있는 가사들이 내가 10대 시절 듣던 노래들의 대체적인 특징인 것 같다. 10대 시절에는 오히려 감수성이 건조했었고, 삶의 경험도 폭넓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노래들을 집중해서 듣고 있으면 그때는 미처 몰랐었던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그 시절의 나와 하루하루 더 멀어지고 있지만, 이런 노래가 있기에 여전히 연결되어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걸 좋아한다. 했던 행동들, 했던 생각들을 떠올리고 이유를 되짚어보면서 후회하는 경우도 많고, 또는 나중에는 이렇게 해야지 라며 다짐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심리검사 결과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스스로를 회고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최근 들어 많아졌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러면서 내가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나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고민이 더 깊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부모님께 몇 가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부모님께 몇 번 회초리로 맞은 기억이 있는데, 무슨 잘못을 했기에 맞은 건지 여쭤봤다.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말이다. 하지만 일일학습지를 풀지 않고 늦게까지 밖에서 놀다가 들어왔을 때 회초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지금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었다. 여러 가지 과거의 경험을 수집했음에도 여전히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자신의 기원을 찾는 과정은 결국 어디로 향해가고 싶은지를 고민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사실 내가 고민하는 내용,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계속 고민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모호한 답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호한 채로 2020년이 코앞에 와있다. 산뜻한 느낌을 주는 2020이라는 숫자의 해라니! 그 해에 나는 끝내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할아버지 제사

할아버지는 1993년 갑자기 돌아가셨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었을 때이다.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가까스로 그 소식을 전해줬을 때, 나는 안방 침대에서 엉엉 울었었다. 9살짜리 꼬마가 사람이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그랬었던 건 아니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의 표정과 반응을 보며 울었던 것 같다. 그다음은 시신을 운구하던 차 안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아버지 옆에서 울었던 장면이 기억난다.

할아버지 기일을 맞아 금요일에 제사를 지냈다. 벌써 26년째 지내고 있는 제사여서 그럴까,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추모는 사라지고, 살아있는 자들의 근황을 확인하고 잡담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제사에 준비할 것들도 예전보다 훨씬 간소해졌다. 하지만 제사라는 게 누군가가 음식을 준비해 차리는 부담스러운 자리인 게 본질이 아니고, 다 같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자리여야 한다는 평소 생각에 비추어봤을 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지 않는 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같이 모여 앉아 밥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지난주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태어나고 할머니가 용한 곳을 찾아 이름을 지어왔을 때, 할아버지가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라고 하셨다 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내가 태어난 1985년에 예순 언저리였을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게 너무 신기했었다. 이 이야기를 기점으로 작은아버지가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해 예전에 할아버지와 있었던 이야기를 여러 가지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내가 전혀 몰랐던 우리 가족들의 옛날이야기와 그 당시 우리나라의 모습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이후부터 할아버지는 마치 영정 사진이나 묘소에 존재하는 멀찌감치 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의 삶에도 함께하고 계셨었다. 외국인이 부자연스러운 입모양으로 발음하는 내 이름, 고등학교 때 러시아어 공부하면서 사용했던 할아버지의 러시아어 사전, 그리고 지난 금요일까지… 늘 함께하고 계심을 기억해야겠다.

임종체험 후기

출처: 머니투데이

죽음,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살만큼 살아서 커다란 미련도 남지 않은 나이가 아니라, 지금 서른 중반 나이에 죽는 건 더 무섭고 두렵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떠나는 게 억울하다. 그리고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것만 같아 너무 싫다.

어제는 임종체험을 했다. 죽는다고 가정하고 영정 사진도 찍고, 유언장을 써보고, 수의를 입고 직접 관에 들어가서 5분 정도 시간을 지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인기가 아주 많은 것 같지는 않다. 부모님께 이런 게 있다, 한번 해보시라 권유했더니 너는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반응이 오는 걸로 봐서는 말이다.

유언장을 쓰던 중이었다. 내가 세상에 남긴 흔적들이 죽고 나면 빨리 사라지겠다는 느낌이 내내 맴돌았다. 군대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단절된 군대 안에 들어와 지내는데, 바깥세상이 나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걸 지켜보면서 많이 서글펐었다. 그 누구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것만 같았다.

영화 <코코>는 멕시코의 명절 “죽은 자들의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사후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승의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다. 잊혀진 자들은 결국 사후세계에서마저도 죽고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가능한 한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프로그램 초반 강연에서 본 영상에는 의사의 인터뷰가 나왔다. 죽는 사람과 그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본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유언장을 쓰고 관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나는 어제 가상으로 한번 죽었다. 현실의 삶에 내 흔적을 많이 남기도록 더 노력해야겠다.

나만의 특징

나는 돈, 시간 등의 자원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가성비’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물건을 살 때도, 그리고 식당을 고를 때도 늘 가성비가 좋은지를 확인한다. 예를 들면 상품평에 가성비가 좋다는 내용이 있거나, 식당이 음식의 질이나 양에 비해서 가격이 비싼지 등을 늘 확인하는 편이다. 

이런 성향을 이용해 취미로 웹사이트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가성비가 좋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주는 웹사이트 말이다.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사서 쓰고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이미 가성비가 검증된 것들이기에, 그중에 하나씩 골라서 올리면 되는 것이었다. 

웹사이트 도메인을 등록하고, 개설에 필요한 작업들을 마쳤다. 어떤 물건을 먼저 소개할지 정하려고 “가성비 XX” 이런 식으로 검색어 순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가성비 간식” 단어의 한 달 검색 횟수가 얼마 정도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당황하게 된다. 대부분의 “가성비 XX” 단어의 한 달 검색 횟수는 100건 미만으로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가성비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가설은 옳지 않은 거였다. 

한편으로는 나만의 두드러지는 특성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웹사이트는 할 생각이다. 그들이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나의 세상에 그들을 가끔씩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