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식

쿠팡에서 로켓배송 상품을 주문한 다음 날이면 쿠팡맨이 문자를 보낸다. 배송 가는 중인데 물건을 어떻게 수령하고 싶은지 물어본다. 다른 택배사에서도 문자나 카톡이 오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 언제쯤 배송 간다는 통보이다. 딱히 답장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쿠팡맨의 문자를 받으면 꼭 답장을 보낸다. 아니, 답장을 보내고 싶어 진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경비실에 맡겨달라거나, 집으로 곧바로 배송 부탁하면서 꼭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회사에서 일하는 중 문자를 받는 경우에는 “저도 쿠팡 다녀요. 쿠팡맨 화이팅”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다.

오늘도 문자가 왔다. 어제 주문한 미세먼지 마스크를 경비실에 안전하게 전달했다는 문자에 나도 쿠팡 다니고 있다고, 쿠팡맨 힘내라고 답장을 보냈다. 응원 고맙다고, 행복한 하루 보내라는 답장이 왔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즐거운 일보다는 힘들고 괴로운 일이 더 많이 뇌리에 남는 시절일지라도, 사소한 즐거운 일에 감사하는 삶이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만 내가 즐거운 만큼보다 훨씬 더 즐거운 건 좀 질투난다. 함께 즐거웁시다 우리.

신조어, 알 수 없었던

요즘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신조어라고 신문에 소개되었다. 굉장히 직관적이면서 명쾌한 활용성을 지니고 있기에 메모해본다.

시발비용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돈 쓴 경우. ‘스트레스받고 홧김에 치킨 시키기’, ‘평소라면 대중교통 이용했을 텐데 짜증 나서 택시 타기’ 등이 좋은 예시

멍청비용

부주의한 탓에 안 써도 되는 돈 쓴 경우. ‘미리 돈을 안 뽑아 놔서 ATM 수수료 내기’, ‘할인받을 수 있는 상품을 제값 주고 사기’ 등이 좋은 예시

쓸쓸비용

외로움을 달래려고 돈 쓴 경우.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친구들에게 밥 사기’ 등이 좋은 예시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데, 왜 처음 들어보는 걸까. 인스타에서 많이 사용되는(거라고 믿고 싶은) 용어라서 그런 걸까(인스타를 하지 않는다). 아니면 이제 젊은이들 문화를 따라잡기에는 힘든 나이가 된걸가.

나만 처음 들어보는 건 아니겠지. 훗.

어머니의 영화 취향

간만에 어머니와 둘이 저녁을 먹었다. 해주신 쭈꾸미볶음 먹고나서, 보답으로 오렌지 까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가족 4명을 살펴보면, 아버지-동생, 어머니-나 이렇게 성격이 비슷하다. 작년 미국여행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대화하는건 늘 편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일을 마저 처리하러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TV로 영화를 즐겨보신다. 돈 아끼려고 유료영화는 가급적 피하고, 무료영화 중에 괜찮아보이는걸 어떻게든 찾으려 애쓴다. 왓챠플레이 결제해서, TV 큰 화면으로 볼 수 있게 크롬캐스트도 설치했더니 처음 며칠간은 열심히 보시다가 요즘은 뜸해졌다. 어머니에게 왓챠플레이는 왜 안 사용하시냐고 물어보니, 겸연쩍게 사용법을 까먹었다 하신다. 그러면 아들한테 이야기나 하시지.

물 뜨러 나가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부르신다.

어머니: 클레멘타인 이라는 영화 아니?

나: 알지. 그거 엄청 졸작이라고 평가 받는 영화야 (*한 네티즌 왈: 52억짜리 재앙이자 한국 영화계 희대의 괴작이자 졸작)

어머니: 엥? 네이버 평점 보니까 사람들 평이 굉장히 좋던데?

나: …그거 사람들이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너도 한번 봐봐라” 하는 심정으로 (관련기사)

어머니: 아 진짜???

나: 응…

울 어무이 어이할꼬.

굳럭!

한국에 아이폰이 출시된 그다음 해 2월, 연수 마지막 날 무선사업부 배치 통지를 받았다. 1 지망 부서는 아니었기에, 약간은 실망했었다. 세부 부서까지 정해지고, 배정된 자리에 앉아 시키는 일 열심히 하고, 어리버리한 모습 보여주며 2개월 정도 있다가 구미로 제조현장 체험을 가게 되었다. 3주간 머무는 동안 했던 일 중 하나는 막 생산되고 있던 폰에 최신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거나, 보호필름을 붙이는 일이었다. 나와 동기들의 손을 거친 제품은 신화의 시작이었다. 갤럭시 S 시리즈.

퇴사한 지 어느덧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는 갤럭시, 그리고 삼성전자를 좋아하고 응원한다. 퇴사를 결심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회사의 성장세가 정점을 찍었고, 앞으로는 내려갈 일만 남았을 거라는 개인적인 전망이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시가총액의 경쟁자 애플, 무섭게 따라붙는 중국기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큰 변화가 있기 힘든 산업 구조 자체를 살펴보면 더 이상 좋아질 이유는 없어 보였다. 위기는 바로 앞에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배터리가 폭발해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굉장히 빡빡한 품질관리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회사였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실물을 만져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던 노트7은 악몽 같은 제품으로 남았다. 그 이후 사용 중인 S7이 폭발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불쑥 튀어 오를 때면, 노트7이 엄청난 타격을 준 게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새벽, 갤럭시 S8 공개행사가 열린다. 이미 제품 영상, 사진, 사양, 관련 행사할 거 없이 전부 유출된지라 깜짝 놀랄만한 요소는 없을 거다. 하지만 S8는 갤럭시 시리즈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판매야 많이 될 거라 믿지만, 노트7과 비슷한 제품 안전 문제가 발생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런 압박감 속에서 몇 개월을 노력했을 이전 동료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에도, 많이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을 거라 짐작된다.

갤럭시 S8을 응원한다. 그리고 삼성전자를 응원하다. 소중한 국민연금을 망가뜨리고, 추악한 면모를 드러낸 경영진은 싫고 참담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커리어의 시작점, 훌륭하고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줬던 그곳, 20대 젊은 날의 절반을 보냈던 그곳을 즐겁게 추억한다. 그래서 뜨겁게 행운을 빈다.

총기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사무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말했다. 나랑 일하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리도 총명할 수 있을까 감탄했다고.

으쓱했던 어깨가 다 내려오기도 전, 덧붙였다.

그런데 요즘은 총기를 잃은 거 같다고.

하아

첫 월급 제대로 쓰기

2주 전부터 옆자리에 신입사원이 앉는다. 석사 병특으로 들어온 개발자 친구이다. 올해 26살, 내가 어리바리하게 회사 생활을 시작했던 바로 그 나이. 그리고 사는 동네 역시도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정감이 가길래 잘 해주고 있었다. 퇴근 시간 2분 전쯤 얼른 퇴근하라고 집에 보내기도 하고, 다른 팀에서 얻어온 먹을 걸 나눠주기도 하고 말이다.

며칠 전이 월급날이었다. 이 친구는 상당히 들떠있었다. 회사 다니면서 받는 첫 월급, 얼마나 감개무량할까. 내가 느꼈던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들떠있는 그 친구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첫 월급은 제대로 써야 한다는 걸 힘주어 강조했다. 부모님께 맛있는 거 사드리고, 선물도 드리라고. 마지막에 살짝 덧붙였다. 같은 팀 사람들에게 맛있는 걸 사는 게 전통이라는 이야기를. 옆에 있던 동료들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한창 일하고 있던 오후, 어디론가 사라졌던 신입사원이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봉지에서 별다방 커피를 열 잔 정도 꺼내더니 말했다. 첫 월급 받은 기념으로 사 왔다고. 순간 정말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빨개져 장난이었는데 정말 사 오면 어떡하냐는 말을 연발했다. 장난으로 말하는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사 오고 싶었다는 그 친구가 나눠준 커피의 맛은 기분 좋은 맛이었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입사 이래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며 농을 친다.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뭔가 퍼뜩 떠오른 동료의 한마디 외침.

“그런데 그때 승환 님은 안 샀잖아요”

역시 첫 월급을 제대로 써야 한다. 경력직도 첫 월급을 제대로 써야 한다.

구애, 동생을 향한

띠동갑인 동생과 친해지는 건 올해 목표 중 하나였다. 몇 년 전까지 악역을 맡아 혼내거나 잔소리하는 게 대화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이름을 부르면, 동생은 움찔하거나 짜증 난 기색을 내비쳤다. 열두 살 많은 형한테 맞받아칠 생각은 차마 하지도 못하고, 뭐라 뭐라 하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나 또한 동생이라기보다는 아들 대하듯이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생각을 바꿨다. 나중에 가족 중 나와 동생 둘만 남았을 때, 좀 더 연락하고 가깝게 지내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을 넘긴 성인에게 뭐라 뭐라 하는 것도 알맞지 않은 거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햇볕정책으로. 최대한 잔소리를 참고, 동생에게 웃는 낯으로 사근사근 대하며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한껏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게 참 쉽지 않다. 하루도 빠짐없이 동생에게 카톡을 보내지만 이 무심한 녀석은 답이 드물다. 기숙사에서 돌아오는 주말에 얼굴 보며 왜 형 카톡을 씹냐 물어보면, 돌아오는 건 깜빡했다는 심드렁한 대꾸이다. 게다가 여름에 함께 유럽여행 가는걸 ‘윤허’받았지만, 항공편과 숙소를 알아보고 결제하는 등 준비하는 건 동생이 아니라 나다. 착착착 정리해서 동생에게 ‘보고’를 올리고, ‘결재’받아 일을 진행한다.

내 매서운 사랑을 이렇게 무심하게 대하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동생아. 갖고야 말겠어 네 마음을. 내 매력에 빠져보아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사람이 붐비는 출근길 9호선 일반 열차. 뒤편에 앉아있던 분이 짐을 주섬주섬 챙긴다. 다행히 그 앞에는 아직 사람이 없다.

잽싸게 뒤돌아 그 앞에 섰다. 이윽고 짐을 챙겨 일어나자 자리가 생겼다. 그때 몇 분 전부터 그 옆에서 기대고 있던 사람이 슬몃 움직인다.

그러나 자리는 누가 봐도 내게 우선권이 있었다. 기회가 다가오면 잡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지하철 내 앞사람들이 도무지 내릴 기미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수신인에 너무 많은 사람을 포함했다는 걸 이메일 보내고 나서야

어머니에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화내고 돌아서고서야

그러지 말았을걸 후회한다

날씨가 참 좋네요

친구의 결혼식은 어제 12시에 시작되었다. 내 첫 유대인 친구인 이 친구는 미국에서부터 원래 알고 지내던 한국인과 결혼하게 되면서 야외에서 전통혼례를 택했다. 작년에 이 커플과 밥을 먹으며 따로 시간을 보내면서 이들이 얼마나 유쾌한지, 그리고 서로를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혼식 역시도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햇살은 눈부시고, 재킷 하나만 걸치고 있기 딱 좋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였다. 함께 결혼식을 지켜보던 하객들이 연방 감탄을 표현했다. 날씨가 참 좋네요.

날씨가 참 좋네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눈부신 햇살, 딱 좋은 온도였지만, 미세먼지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휴대폰 첫 화면에 보이는 미세먼지 알림 위젯은 빨간색이 들어와 있고, 하늘은 푸른 듯 뿌옇다. 밖에 나갈 때면 꼭 마스크를 쓰는 나였지만, 차마 결혼식에서까지 마스크를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입어본 한복이 마음에 드는 듯한 표정과 함께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친구 어머니를 보며 마스크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저 사람은 미국인이고, 나는 한국인이지 않는가.

그 시점을 나타내는 ‘날’과 마음씨, 말씨처럼 모양과 형태를 표현하는 ‘씨’가 합쳐진 게 ‘날씨’이다. 여태까지는 기온, 햇살, 눈비바람 여부 등이 날씨를 이뤘다. 우리 조상님들에게 공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공기는 항상 좋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날씨에 공기를 포함시켜서 생각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집값이 비싸서, 일자리가 없어서 헬조선이 아니라 들 이마 쉬는 공기가 안 좋아서 헬조선인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용을 쓰면서 전통혼례 절차를 따라가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미세먼지를 마시는 게 뭐가 대수냐 싶었다. 입이 귀에 걸린 듯 큰 웃음과 하객들을 빵 터지게 만든 시원한 만세삼창 등 모든 게 좋았다. 그래 좋은 날씨라는 건 내가 좋고, 다른 사람도 좋으면 좋은 거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하나같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는 날씨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