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지금 누리거나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건지 생각해본 적이 많지 않다. 서울 내 북촌 혹은 서촌 등 한옥들이 모여있는 곳을 즐기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지어진 한옥들이 보존된 채 남아있는 지역이라고만 단순히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정세권이라는 인물에 대한 입체적으로 조망하며 일제시대를 알려준다. 그 당시에도 파이낸싱까지 해결하는 부동산 디벨로퍼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독립운동까지 적극 지원하는 정세권의 삶의 궤적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다. 명확한 비전과 실행력, ‘개밥 먹기’를 주저하지 않는 꼼꼼함, 그리고 열정 모든 게 인상적이다.

정세권을 인터뷰했다는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는가’ 지면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것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렵지 않고 술술 넘기며 읽고 난 뒤에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것은 과거 누군가에게 진 부채라는 걸 말이다.

10년, 이런저런

#1 어떤 10년

지난 10년간 한해도 빠짐없이 입었다. 특히 더운 날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같이 입었다. 의자 뒤에는 방상내피, 전문용어로 깔깔이가 항상 걸려있다. 지퍼 부분이 뜯어진 게 재작년이던가. 날이 가면 갈수록 뜯어짐이 심해졌다. 동네 수선집에 들고 갔더니, 할아버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천 원을 내니 새것처럼 고쳐주셨다. 앞으로 10년도 끄떡없을 만큼 탄탄한 바느질이다. 지퍼 올리는 느낌이 부드럽고 좋다.

#2 다른 10년

지난 10년간 잠들어 있었다. 중학생 때 얻은 인생 세 번째 전자시계가 책상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군 시절까지 손목을 꿰찼었는데 세월 무상이다. 수영장에서 사용할 초시계를 찾다가 퍼뜩 책상 속에 있을 녀석이 생각났다. 동네 시계방 아저씨에게 설명하니 자신 없는 표정이다. 새 배터리를 넣어도 열에 하나 살아날까 말까 하다고 말씀하신다. 이 녀석은 열에 하나인 녀석이었다. 날짜와 시간을 맞출 때, 뾱뾱 소리가 그대로이다.

#3 지난 10년

지난 10년간 계속 변해왔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변할 수 있는 것 같다.

우유, 따뜻한 한 모금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있는데, 허기진다 싶으면 우유를 한 컵 데워마신다. 따뜻한 우유가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보고 시작된 습관이다. 실제로 내 잠에 도움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꿀꺽 삼킨 우유가 온몸 구석구석에 쫙 퍼지는 느낌은 따뜻한 물을 마셨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몸에 여유가 생기면서, 기운도 생긴다.

따뜻한 우유의 좋은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블로그에 글을 매일 쓰겠다는 올해 결심을 지키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건만, 뭐를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때 훌륭한 글감이 되어준다. 컵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운 우유는 윗부분이 따듯하다.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점점 미지근해진 우유를 맛볼 수 있는데, 흡사 ‘고진감래’ 같은 폭탄주를 맛보는 듯한 묘한 기분을 준다.

일 년 365일 냉장고에 우유가 떨어지지 않도록 챙기는 건 어머니의 몫이지만, 정작 당신은 드시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깜빡하고 바닥을 드러내는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좌불안석이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시킨 심부름이 단연코 우유 심부름이었다. 당신 자신이 아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우유에 깊이 담겨 있다.

우유는 본디 따뜻한 거다. 적어도 우리 집 우유는 그렇다. 본디 따뜻한 우유를 데워마시니 내 마음 구석구석 따뜻해진다.

쌍꺼풀 두겹

왼쪽 눈 두 덩이에 뭔가 내려앉은 느낌이다. 한두 달째 왼쪽 쌍꺼풀이 두 겹이다. 예전에는 매우 피곤한 날에만 두 겹이었지만, 요즘은 잠을 잘 자고 푹 쉰 날에도 한 겹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왼쪽으로 돌아눕는 잠버릇이 문제일까 싶어 똑바로 자거나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자기도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비슷한 고충을 겪는 사람이 또 있을까 궁금해졌다. 쌍꺼풀 두 겹 검색해보았다. 몇 개 지식인 질의응답이 나온다. 원래 피곤할 때만 두 겹이 되었으나, 이게 풀리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비슷한 사연이었다. 답변이 적혀있었다. 눈 주변 피부가 땅기는 힘이 약해지고 늘어져서 두 겹이 되는 거라고 친절히 적혀있었다.

그렇다. 내 피부는 점점 덜 팽팽해지고, 힘이 달리고 있었다. 쌍꺼풀 두 겹은 나이 듦의 징표였던 것이다. 이러다 오른쪽도 두 겹이 되고, 급기야 왼쪽은 세 겹이 되고 그럴까. 두려워졌다.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그런 일은

불현듯 머릿속을 맴도는 노래가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멜로디는 떠오르지만, 제목이 분명치 않은 경우이다. 가사라도 제대로 알면 어떻게든 찾아보겠지만, 형편없는 한국어 듣기 실력 탓에 가사도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지난주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한 노래는 다행히도 가사와 제목이 명료하게 기억났다. 박화요비의 ‘그런 일은’. 노래를 들을 때 대부분의 경우 가사 의미에 큰 귀를 기울이지 않는 편인데, 이 노래는 가사가 정말 예술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라이브. 목 수술 탓에 원곡처럼 부르지 못한다.

유튜브를 좀 더 찾아보니, 보이스 오브 코리아에서 다른 사람이 부른 버전도 괜찮다.

 

너무나 멀어보여요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언제나 나를안아주던
따스한 인사도 잊은건가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
혹시 나미워졌나요
아니죠 떠나려는건아니죠
그런일은 절대로 없을꺼라
나는 믿을게요
오늘은 안돼요
내사랑이 이대로는
이별을 감당하기 어려운걸요
많은약속을
다 지울순 없잖아요
아직도 해드릴게 참많이있는데

얼마쯤 걸어가다가
한번은 날뒤돌아봐 줄꺼죠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다가와
웃으며 안아줄꺼죠
정말 날좋아했는데
정말 날아꼈었는데
아니죠 그대를다시 못보는
그런일 절대로 없는거죠
나는믿을게요

오늘은 안돼요
내사랑이 이대로는
이별은 감당하기 어려운걸요
많은약속을 다 지울순 업삲아요
아직도 해드릴게
참많은걸요

내일아침엔 더힘들어 질꺼예요
어쩌면 몇일밤을 지새우겠죠
언제까지나
곁에있기로 했잖아요
그대가 아니라면 난 혼자인걸요

결핍

절묘한 시점의 결핍은 중독을 야기한다

외로운 때의 결핍은 열망을 불러모은다

관심 받고싶어할수록 결핍이 심해진다

손가락 하트 회의론자

‘여러분 사랑해요~!(하트)’

두 손 검지와 엄지를 맞대어 큼직한 하트를 그리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대세는 손가락 하트다. 두 손을 맞대는 대신에 두 손가락을 비빈다. 조그마한 하트가 만들어진다.

나는 이 손가락 하트가 싫다. 손가락 하트는 일단 크기가 작다. 마음 씀씀이가 너무 쫌생이스럽다. 하트의 핵심은 ‘듬뿍’ 담긴 애정이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손가락 하트는 노력 없이도 쉽게 만들 수 있다. 엄지를 검지 4분의 1 지점에 슬며시 포개면 된다. 졸면서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두 손을 맞대어 만드는 하트는 만들기 어렵다. 바람직한 하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당한 각도로 검지를 꺾어줘야 한다. 만들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렇게 손가락 하트를 비판해도 세상은 바뀌는 게 없다. 바뀐 지 좀 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나는 큼직한 하트가 좋다. 애정이 듬뿍 담긴 만들기 어려운 하트가 좋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은 당신 뜸해졌어요. 기껏해야 이틀에 한번, 아니면 하루에 한 번? 이해는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날이 추워지고 건조해질수록 자주 만나기가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만날 때만이라도 다정하게 대해주면 참 좋겠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네요. 자꾸만 억세게, 거칠게 대하네요.

땀에 흠뻑 젖어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자면, 점점 기운이 빠지는 걸 느낍니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한 기분이에요.

저는 걱정이에요. 단단하지 않고 흐트러진 모습, 당신이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음을 다시 잡아보려고 애를 써도 그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닌걸요.

자꾸 흐트러진 모습, 풀어진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조금만 더 세심하게 다뤄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해봐요 뭐하겠어요. 그게 내 운명인걸

여기까지 인가 봐요. 더 이상 방법이 없네요. 그래도 나 최선을 다했다는 건 잊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샤워볼

 

좋은 녀석 만나기가 참 어렵구나 생각하며, 어김없이 풀어진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말이 들렸다. 샤워볼이 건네는 말이.

박쥐

이쪽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저쪽에서는 힘주어 부인하지 않고 묵인하고

어쩌면, 나는 박쥐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