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금 다시, 헌법

‘법’은 내게 항상 딱딱하고, 어색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대학교 전공 수업 중에도 법 관련된 수업이 여럿 있었지만, 유독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부끄럽게도 대학교 4년 내내 법만큼은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졸업하게 되었다. 어떤 주제가 나오더라도 한마디 정도는 거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법에 대해서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내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지나가던 어느 날, 이 책을 주문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둘러보러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는데, 열심히 광고 중이던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요즘에 비분강개하고 있던 나였다. 궁금해졌다. 과연 대한민국의 기초가 된다는 헌법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말이다. ‘지금, 다시 헌법’은 태어나서 처음 읽는 법 관련 책의 영예(?)를 꿰찼다.

헌법 구절 하나하나를 적어두고, 다소 무미건조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는 책에서 감동과 환희를 느꼈다면 거짓말일 거다. 맞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근거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어떤 여정을 지나 거기에 이르렀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꽤나 깊은 여운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작금의 시국이 헌법에서 설명하는 가치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부가적으로는 한 나라의 헌법을 정한 사람도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을 수 있구나라는 안도감까지!

[책]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하면, 그 사람의 가족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다. 그리고 힘을 모아 외친다,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변의 관심을 촉구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수 클리볼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녀의 목을 졸랐지만, 슬픔을 드러낼 수 없었다. 살인자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더없이 사랑스럽고 천사 같던 아들이 바로 그 악마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아들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라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지푸라기를 찾아보지만, 점점 잡을 수 있는 게 사라진다. 그 천사가 그 악마였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접는다. 아들이 악마로 변해갈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목 조른다.

이 책을 꾸역꾸역 완성해내면서 셀 수 없이 소리 죽여 울었을 그녀의 용기에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낸다. 내가 읽어본 책 중 이렇게 저자의 피눈물이 스며든 책은 없었다.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이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용서받기 어려운 아들의 삶을 이렇게 저렇게 계산해보며 피눈물 가득한 책으로 꿰매 졌다.

새로운 휴가

졸업 후 일하기 시작한 이래 내게 휴가는 ‘해외여행’과 같은 의미였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이야기처럼 전역하고 혼자 보낸 유럽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휴가 계획을 세울 때면 이번에는 어느 나라를 갔다 올지 고민했다. 시킨 사람도 없지만 열심히 알아보고, 계획을 세워 비행기를 타고 그곳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시간. 그래야만 진정한 휴가라고 생각했었다.
내일부터 화요일까지 보내는 휴가 기간은 조금 다르게 보내려고 한다. 한적한 곳에 가서 정말 쉬다가 오리라 마음먹었다. 눈만 감으면 업무 생각으로 머리가 뒤죽박죽 되고, 회사 사람들이 얼굴이 안 좋다며 휴가 안 갈 거냐 물어보는 상황에서 어떻게라도 한 박자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게도 늘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단어, ‘힐링’을 포함해 후보지를 물색한 끝에 강원도 평창에 한적한 집을 하나 발견했다.

가서 무엇을 할지 딱히 정한 건 없다. 집 안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근처를 거닐며 맑은 공기를 마시거나 그럴 거 같다. 한 가지 마음을 굳힌 건 휴대폰은 저녁때까지 꺼놓고 지내야겠다는 거다. 이메일 알림도 모두 꺼놓고 말이다. 아직은 의심에 가득 차 있다. 출발 하루 전인 지금도 괜히 강원도까지 가서 돈 버리는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휴가라는 게 문자 그대로 쉬는 게 목적이라면 적절한 해답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내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휴가를 떠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이어폰 없이 뿅뿅뿅 소리 내며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아들딸이 뽀로로 영상을 보고 싶다 보채지만, 이어폰을 꼽아주면 귀 건강에 안 좋을까 끔찍이 염려된다. 이렇게 하늘도 감복할만한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그나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성인이 그런 식으로 휴대폰을 사용할 때면 더 이해가 안 된다. 오늘 출근길에도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서 연신 소리 내며 게임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 내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던 탓에 조금은 조그맣게 들렸지만, 신경이 곤두서는걸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몇 정 거장이 지나가기 전 그 학생은 내렸고, 주위는 평온을 되찾았다.

이렇게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왜 그럴까.

Flywheel

‘Flywheel’이라는 게 있다. 어떤 회사 혹은 사업이 성공하고 성장하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를 정의하고, 요소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개념이다. 첫 번째 요소는 두 번째 요소를 강화해주고, 두 번째 요소는 세 번째 요소를 강화해주고,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요소가 첫 번째 요소를 강화해준다. 좀 더 친근한 용어로 풀면 선순환 구조라는 말이 적합하다.

아마존을 다룬 책 The Everything Store를 읽다 보면 베조스와 임원들이 아마존의 Flywheel을 정의하게 된 순간이 나온다. 회사가 시작된 지 몇 년 만에야 정의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아마존을 많이 참고하는 우리 회사도 Flywheel이 있다. 아주 명료하게 성공 방정식을 표현하고 있다.

Amazon Flywheel

야심한 밤에 일을 하고 있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일을 하며 고민하던 프레임웍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보면 섬뜩한 경우가 많다. 평생 함께 하기는 힘든 회사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평생 함께 해야만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고민하다 그냥 놓아버린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그래서 문득 생각해본다. 내 인생의 Flywheel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ver. 32.9.9 끝자락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 2002 월드컵 경기 중 선수 소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저 선수는 33살이라니 정말 늙었구먼 곧 은퇴해야겠어”. 그래 내일이면 내가 그 33살이 된다. 은퇴는 큰일 날 소리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뚱이를 볼 때면 슬퍼진다. 나 ver. 32.9.9, 2016년의 끝자락에서 올 한 해를 되돌아본다.

 

기억에 남는 일 TOP 3

  • 미국 가족여행
    • 가족 4명 모두가 함께 가는 것 자체도 굉장히 오랜만인데, 미국은 5살 때 한국 돌아온 이후 27년 만이었다.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년-샌프란시스코를 둘러보는 여정은 정말 평생 추억으로 남을 거다. 다시는 가족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가족여행이라 참 좋았다는 행복함을 동시에 남긴 모순투성이 여행.
  • 세 번째 직장
    • 배움과 좌절, 성장과 후회, 기쁨과 실망 모든 걸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직장 이후, 세 번째 직장을 얻었다. 거의 모든 물건을 온라인으로 구입하는 나지만, 온라인 쇼핑 회사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었다. 그동안 써본 적 없는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입사 전 기대한 바를 정확히 얻고 있다.
  • 지하철에서 귀인을 만나다
    • 어디로 가야 할 때면 주로 지하철을 이용한다. 가끔씩 예상치 못한 사람과 오랜만에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4월 오래도록 알고 지냈지만,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사람과 지하철에서 마주쳤다. 아주 귀하디 귀한 사람이었다.

 

기억에 남는 테크니들 기사 TOP 3

2015년 10월부터 테크니들 필진 활동을 시작했는데, 올 한 해 동안 딱 40개의 기사를 썼다. 매주 적어도 한 개씩은 쓰자는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꾸준히 했다는 점에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내가 쓴 기사 중 기억에 남는 3개를 골라본다.

  • 알파고 시대, 당신의 일자리 생존법
    •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직후 독자 반응이 좋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야심 차게 쓴 기사이다. 시류에 편승해 소재를 고르긴 했지만, 원문 자체가 워낙 좋아 스스로도 많이 배웠다. 예상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 페이스북 인스턴트 아티클에 비디오 광고 추가 예정
    •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면 안 된다는 배움을 얻은 기사였다. 당시 미국에서만 서비스되던 기능이라 직접 사용할 수가 없었기에, 소개 동영상 등을 참고해 기사를 썼는데, 페이스북 직원이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줬다. 부끄러운 마음에 곧바로 내용을 고치고, 앞으로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면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좌절)
  • 아마존이 창고에 상품을 뒤죽박죽 보관하는 이유
    • 필진 활동하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거다. ‘매주 1개씩’ 원칙을 지키려고, 일요일 점심 약속 가기 전 후다닥 쓴 이 기사에 열광적인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신기하다고 생각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신기했는지 페이스북에 계속 공유되더니 2016년 테크니들 인기기사 4위에 올랐다.

 

기억에 남는 영화 TOP 3

올해 40개 영화를 봤다. 생각보다 숫자가 적어서 놀랐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왓챠’에 기록했기 때문에 숫자는 정확하다. 그때마다 적었던 감상평을 덧붙인다.

  • 우리들
    • 보는 내내 감정이 요동쳤다. 미소가 절로 지어지다가도,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고. 영화 속 애들의 고민은 어른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 색, 계
    • 경계는 희미해지다가 무너지고, 내가 바뀐다

  • 최악의 하루
    • 여러개 가면이 겹치고 부서진 날. 무대인사로 멀찌감찌서 본 한예리는 얼굴이 어떻게 저리도 작을까 싶었다.

 

기억에 남는 지름 TOP 3

온라인 쇼핑을 좋아하다 보니 한 달에도 몇 개씩 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3가지를 고른다는 건 쉽지 않았다.

  • 스페셜티 원두
    • 주말마다 원두를 갈아 드립 커피를 내려마시다 보니 주기적으로 원두를 구입해야 했다. 구입처를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에 하루 날 잡고 열심히 조사한 끝에 보물 같은 원두 쇼핑몰을 발견했다. 스페셜티 원두 200g을 8천 원 정도에 판매하는 이 곳만큼 가성비가 뛰어난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 킨들
    • 영어책 읽는 횟수를 확 늘려준 1등 공신. 가방에 항상 넣고 다니며 주로 지하철 탈 때나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을 때 지루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 짐볼
    • 일하면서 동시에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사무실 의자 대신 짐볼에 앉아서 일하는 걸 떠올렸다. 즉시 조사를 시작했고, 가격대가 조금 높지만 안정성과 효과를 인정받은 TOGU 제품을 주문했다. 처음에는 피곤함 때문에 짐볼과 의자에 번갈아가며 앉았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짐볼에 앉아도 끄떡없다. 나를 보고 팀 동료들도 짐볼에 앉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책 TOP 3

‘왓챠’로 그때그때 기록해놓는 영화와 달리 책은 체계적으로 기록해두지 않아서, 순전히 현재 기억에만 의존해야한다. 다행히 아래 3개 중 2개는 블로그에도 적어놨었다.

  • 욕망해도 괜찮아
    • 책을 덮고 내린 결론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계속해서 경계를 넓혀가며 일종의 실험을 계속해야겠다. 그래야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고, 내 삶이 풍성 해질 테니까.

  • Models: Attract Women Through Honesty
    • 미국의 라이프 코치인 Mark Manson의 블로그는 비범한 통찰력이 담긴 글이 가득한, 내가 아주 좋아하는 블로그이다. 매우 세속적인 제목의 이 책은 단순히 ‘여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vulnerability)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강해지는 유일한 길이라는 역설이 담긴 아주아주 좋은 책.
  • 4001
    • 문득 내 기억들도 의심 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사오던 첫날, 정말 아파트 거실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을까. 또 자랑처럼 이야기하던 기억들은 정말 사실일까. 조금씩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기억을 조작한다. 그러면 내 기억이 100% 그대로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고 모든 사람이 어느 면에서는 신정아와 비슷한 사람인 걸까. 그녀가 처연해진다. 조작된 기억을 계속 굴려 앞으로 나아가 큰 눈덩이를 만들었던 죄가 참 무겁다.

 

나 ver. 32.9.9, 이제 업데이트 시점이 다가온다. 다들 알겠지만, 업데이트한다고 마냥 좋아지는 건 아니다. 업데이트를 후회하며 다운그레이드하고 싶다 아우성치는 사람도 있고, 더 심하게는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이번이 끝이 아니고, 계속 업데이트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ver. 33.0.0으로 업데이트하련다.

부전자전

대략 20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는 외국계 회사로 자리를 옮기셨다. 시티폰 부스가 동네에 막 생기려던 시기에 회사에서 제공한 ‘애니콜’을 들고, ‘빨콩’ 키보드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IBM 씽크패드 노트북을 들고 다니셨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호텔에서 컨퍼런스 발표나 식사를 하고 오시고, 간간히 신문에 칼럼도 연재하던 아버지의 ‘리즈’시절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아버지는 퇴근하고도 집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계속 작업하셨다. 당시 삼성 매직스테이션 ‘펜티엄’ 데스크탑을 사용하면서 컴퓨터를 즐겨하던 나는 아버지가 행복할 것이라 여겼다. 회사에서 공짜로 준 최신식 컴퓨터를 집에서도 만지작 거릴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껏 부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내게 아버지는 조금은 난처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 표정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숨에 써지지 않는 내년도 전략 문서를 붙잡고 있다가, 놓아두고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다. 옆에서 식사하시는 아버지를 보자 문득 20년 전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방문을 열면 노트북 화면을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계시던 뒷모습이 있었다. 도저히 답이 안 떠오르는데, 당장 몇 시간 뒤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문서에 괴로워하던 뒷모습이었으리라.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맞나 보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아버지를 아들은 20년 후에 따라 하고 있다.

사랑니 뽑았니

사랑니라는 나하고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평소에 치아 관리를 잘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치아가 건강한 편이었다는 점이 한몫했을 거다. 그러다 3년 전쯤인가 왼쪽 위 어금니 뒤에 사랑니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때도 별 걱정 없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왼쪽의 느낌이 싸해지면서, 급기야는 왼쪽으로 음식을 씹을 때 통증이 엄습해오자 덜컥 겁이 났다. 용의자는 사랑니였다. 내게도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부리나케 정보를 수집하던 중, 신촌에 사랑니 발치 전문 치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뽑은 사랑니가 3만 개가 넘는다는 그 치과. 그 자리에서 예약하고 어제 퇴근 후 방문했다. 신촌 현대백화점 뒤 셀 수 없이 많이 지나다니던 건물 위에 치과가 있었다. CT 사진을 보니 왼쪽 위 1개, 오른쪽 아래 1개가 눈에 들어왔다. 진료 의자에 앉히더니 갑자기 입을 벌리라고 하고는 마취를 시작한다. 어라 벌써 시작인가? 입 안이 얼얼해지자 의사 선생님이 다시 옆에 앉는다.

뽑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한 뭔가가 우지끈 뽑히는 소리가 들린다. 20초쯤 지났을까, 선생님이 다 되었다고 말한다. 안심시키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거즈를 물려준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달처럼 휘어있는 피 묻은 이가 하나 보인다. 집에 와서 앉아있는데, 2시간쯤 지나자 마취가 풀리면서 아파온다. 거울을 보니 왼쪽 볼이 퉁퉁 부어있고, 심술이 가득해 보인다.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도 입을 크게 벌리려 하면 아프다.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은 오묘하다. 어금니를 얍삽하게 공격하던 녀석이 사라졌지만, 꽉 차 있던 자리가 텅 빈 느낌이다. 이 공허함에 익숙해지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직 뽑지 않은 오른쪽 녀석은 사진으로 보니 거의 대청마루에 눕듯이 누워있다. 공사가 좀 클 거라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나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평화롭게 둘 것이다. 치과라는 곳은 어지간하면 가지 않는 게 좋은 곳이니까 말이다.

세일즈맨은 죽고, 배우는 빛나다

60년 연기 인생. 고작 30년 남짓 살고, 일하기 시작한 지 10년도 안 되었지만. 60년 동안 연기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배우 이순재 씨의 연기 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주말에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내 돈 내고 보는 공연을 굳이 행운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티켓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차례 시도한 끝에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봤던 아서 밀러의 연극 또한 이순재 씨와 인연이 깊다. 그가 연출하고 서울대 극단이 열연한’시련’이었기 때문이다. 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 작품을 보면서 꽤나 깊은 울림을 기억을 떠올리며, 그와의 인연을 유달리 강조한다. 상대방에게 밀쳐져 넘어지고 다시 힘겹게 일어서는 장면에서는 저러다 다치는 건 아닌지 가슴을 조아리며 바라보기도 했다.

함께 열연한 손숙 씨의 연기 인생도 50년이 훌쩍 넘는다. 둘이 합쳐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벼리어진 날카로움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아서 밀러의 대본대로 매우 어둡고 쓸쓸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임에 틀림없나 보다. 1940년대에도 주택 대출을 갚으려 발버둥 치고, 노후를 걱정하고, 가족 간의 냉소를 벗어나려 애쓰는 모습을 보니 ‘헬조선’은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토록 어두운 작품 속에서도 이순재 씨는 눈부시게 빛났다. 다시는 없을 그의 작품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던 시간 또한 빛났다.

귤 까먹기

귤 까먹는 시간은 가장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아쉬운 시간이다. 곱게 껍질을 벗겨내고, 새콤 상콤한 속살을 입에 넣는 느낌은 행복 그 자체이다. 참고로 귤을 적당히 때리면 더 달아진다. 호기심 천국에 나왔다. 반면에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해지는 탓에 책이나 신문을 읽지 못하고, 휴대폰으로 인터넷도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오늘도 역시나 아쉬움을 느끼려던 찰나, 짧은 동영상이나 하나 틀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틀어놓은 TED 영상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대학교 4학년 때, 그러니까 바야흐로 7년 전(아아 세월이란!) 당시에 TED는 최첨단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물도 아니고 세물 정도 간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재생 버튼을 누른 영상은 ‘100일간의 거절에서 내가 배운 것’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곧 내 나이 또래의 중국계 남자가 나와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내 영상에 빠져들었다.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초롱초롱 쳐다보기도 하면서 어느새 마지막 귤과 함께 영상도 끝났다.

발표자 지아 쟝은 여섯 살 때 친구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경험이 서른이 된 자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이를 깨부수려고 한다. 그러면서 100일 동안 무모하다시피 한 행동을 하며 무수히 많은 거절을 경험해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상황 자체가 불편해 도망쳤지만, 점점 거절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 어떤 때는 거절을 승낙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예상한 것보다 더 그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 가장 큰 웃음을 주었던 건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서 올림픽 오륜기 모양 도넛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에피소드였다.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요청이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성심성의껏 만들어진 오륜기 모양 도넛을 얻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자꾸만 잊어버리는 진리가 다시 떠올랐다. TED 영상 꼭 한번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