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커버 이미지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올려놨었다. 이름을 들어본 기억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작가인지도 몰랐다. 전시회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봤고, 기사에 있던 그림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 골랐다. 어느날 누군가 물어봤다. 마크 로스코 좋아하냐고. 고민하다가 답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전시회를 보러 가야겠다고.
2달 전쯤 마크 로스코 전시를 보러 예술의 전당에 갔었다. 가는 길에 검색해보니 마크 로스코의 대표작들이 포함된 훌륭한 전시라고 한다. 기대감이 더 커졌다. 다행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초기 작품들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약간은 심드렁해졌다.
전시의 어느 지점부터 그의 그림이 급격하게 변했다. 카톡 커버 이미지와 비슷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명확하지 않고 뭉개져있는 형태들. 무한함을 담아내기 위해서 유한한 형태가 사라진 작품들. 직접 보지 않고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집에 걸어두면 멋지고 괜찮겠다 생각했던 작품들. 달랐다. 새벽 공기처럼 마음이 가라 앉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전시 막바지에 이르자 온 몸이 쇠사슬에 묶인 듯 무거워졌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로스코 채플을 본뜬 공간에서는 압도감 속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분명히 언젠가 경험한 적 있는 그런 압도감이었다. 기억의 미로를 더듬거리며 헤집다가 떠올랐다. 로마에서 만난 팡테온. 앉아있으면 천장이 내 쪽으로 쏟아질것 같던 그 느낌. 그러면서 황홀감이 귀를 간지럽혔던 그 곳. 팡테온에 압도된채 3시간 넘게 앉아있었다. 잠시 잊고 있던 그 기억과 마주했다.
20세기 초에 태어난 대계 러시아인 Ма́ркус Я́ковлевич Ротко́вич (나 러시아어 할 줄 아는 남자다. 마르쿠스 야코브레비치 롯코비치!) 유년기 미국 이민까지 이어지는 그의 성장기에 희극과 환희는 없었다. 반유대주의 움직임이 전 세계적을 휩쓸고 있던 시기. 운명처럼 갖게된 혼란과 상실감이 그를 지배했고, 궁극의 경험을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항우울제 과다복용 상태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그은 마크 로스코의 주변은 붉은 피로 흥건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 볼 수 있던 강렬한 붉은색과 다르지 않았을거다. 장중함과 풍부함이 느껴졌겠지. 관객들이 작품 앞에서 종교적 체험을 하길 원했던 작가. 숭고함과 무한함을 담아내던 작가는 그의 작품과 같은 죽음으로 삶을 마무리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던 전시를 한번 더 갈까말까 고민했었다. 결국 가지 않은 나의 게으름을 글을 쓰면서 책망한다.
안뇽 승환- 나 혜빈! 난 대전에 있느라 못가봤네 으으으 아쉽다.. 담에 서울에서 한번 봐 – 이야기들어보구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