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부터 다니는 회사는 전 직원이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취지를 설명 듣지는 못했지만, 수평적인 의사소통과 상당히 많은 외국인 임직원을 배려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따로 영어 이름을 짓기보다는 한국어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지만, 그러기 힘들 것 같아 포멀 하게 ‘SH’라는 이니셜로 불러달라 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나를 직책으로만 부르는 일이 벌어졌다. ‘에스에이치’ 5음절이 너무 길다는 이유였다. 불리지 않는 이름은 죽은 이름이나 다름없다. 그러던 중 옆자리 ‘타코’님께 물어봤다. 왜 타코냐고. 타코를 좋아한단다. 그래서 나도 정했다. ‘나초’로. 2음절로 짧기도 하고, 스페인어 이름인 ‘Ignacio’의 애칭이 나초라는 논리와 함께. 그러자 동료들이 자꾸만 이름을 불러준다. 나를 너무 자주 찾아서 이제는 그만 불러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서구권에는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호칭을 이름을 빼고 성으로만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리오넬 메시’의 유니폼에는 ‘메시’라고만 적혀있다. 골을 넣거나 어시스트를 보며, 해설자와 캐스터는 외친다. ‘메시! 메시! 메시!’.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리오넬’ 혹은 ‘레오’라고 불렸을 거고, 그게 더 와 닿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대개 이름이 3음절이고, 글씨 너비도 좁아 유니폼에 성부터 이름까지 다 적을 수 있다. 그래서 성뿐만 아니라 이름을 불러준다. ‘박지성!’이라고. 나도 상상해본다. ‘이!’만 들었을 때와 ‘이승환’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승환!’이 훨씬 더 뭉클하다.
그렇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나는 완성된다. 그러니 이름을 불러다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 김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