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2002 월드컵 경기 중 선수 소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저 선수는 33살이라니 정말 늙었구먼 곧 은퇴해야겠어”. 그래 내일이면 내가 그 33살이 된다. 은퇴는 큰일 날 소리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뚱이를 볼 때면 슬퍼진다. 나 ver. 32.9.9, 2016년의 끝자락에서 올 한 해를 되돌아본다.
기억에 남는 일 TOP 3
- 미국 가족여행
- 가족 4명 모두가 함께 가는 것 자체도 굉장히 오랜만인데, 미국은 5살 때 한국 돌아온 이후 27년 만이었다.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년-샌프란시스코를 둘러보는 여정은 정말 평생 추억으로 남을 거다. 다시는 가족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가족여행이라 참 좋았다는 행복함을 동시에 남긴 모순투성이 여행.
- 세 번째 직장
- 배움과 좌절, 성장과 후회, 기쁨과 실망 모든 걸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직장 이후, 세 번째 직장을 얻었다. 거의 모든 물건을 온라인으로 구입하는 나지만, 온라인 쇼핑 회사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었다. 그동안 써본 적 없는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입사 전 기대한 바를 정확히 얻고 있다.
- 지하철에서 귀인을 만나다
- 어디로 가야 할 때면 주로 지하철을 이용한다. 가끔씩 예상치 못한 사람과 오랜만에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4월 오래도록 알고 지냈지만,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사람과 지하철에서 마주쳤다. 아주 귀하디 귀한 사람이었다.
기억에 남는 테크니들 기사 TOP 3
2015년 10월부터 테크니들 필진 활동을 시작했는데, 올 한 해 동안 딱 40개의 기사를 썼다. 매주 적어도 한 개씩은 쓰자는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꾸준히 했다는 점에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내가 쓴 기사 중 기억에 남는 3개를 골라본다.
- 알파고 시대, 당신의 일자리 생존법
-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직후 독자 반응이 좋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야심 차게 쓴 기사이다. 시류에 편승해 소재를 고르긴 했지만, 원문 자체가 워낙 좋아 스스로도 많이 배웠다. 예상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 페이스북 인스턴트 아티클에 비디오 광고 추가 예정
-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면 안 된다는 배움을 얻은 기사였다. 당시 미국에서만 서비스되던 기능이라 직접 사용할 수가 없었기에, 소개 동영상 등을 참고해 기사를 썼는데, 페이스북 직원이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줬다. 부끄러운 마음에 곧바로 내용을 고치고, 앞으로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면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좌절)
- 아마존이 창고에 상품을 뒤죽박죽 보관하는 이유
- 필진 활동하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거다. ‘매주 1개씩’ 원칙을 지키려고, 일요일 점심 약속 가기 전 후다닥 쓴 이 기사에 열광적인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신기하다고 생각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신기했는지 페이스북에 계속 공유되더니 2016년 테크니들 인기기사 4위에 올랐다.
기억에 남는 영화 TOP 3
올해 40개 영화를 봤다. 생각보다 숫자가 적어서 놀랐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왓챠’에 기록했기 때문에 숫자는 정확하다. 그때마다 적었던 감상평을 덧붙인다.
- 우리들
보는 내내 감정이 요동쳤다. 미소가 절로 지어지다가도,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고. 영화 속 애들의 고민은 어른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 색, 계
경계는 희미해지다가 무너지고, 내가 바뀐다
- 최악의 하루
여러개 가면이 겹치고 부서진 날. 무대인사로 멀찌감찌서 본 한예리는 얼굴이 어떻게 저리도 작을까 싶었다.
기억에 남는 지름 TOP 3
온라인 쇼핑을 좋아하다 보니 한 달에도 몇 개씩 지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3가지를 고른다는 건 쉽지 않았다.
- 스페셜티 원두
- 주말마다 원두를 갈아 드립 커피를 내려마시다 보니 주기적으로 원두를 구입해야 했다. 구입처를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에 하루 날 잡고 열심히 조사한 끝에 보물 같은 원두 쇼핑몰을 발견했다. 스페셜티 원두 200g을 8천 원 정도에 판매하는 이 곳만큼 가성비가 뛰어난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 킨들
- 영어책 읽는 횟수를 확 늘려준 1등 공신. 가방에 항상 넣고 다니며 주로 지하철 탈 때나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을 때 지루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 짐볼
- 일하면서 동시에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사무실 의자 대신 짐볼에 앉아서 일하는 걸 떠올렸다. 즉시 조사를 시작했고, 가격대가 조금 높지만 안정성과 효과를 인정받은 TOGU 제품을 주문했다. 처음에는 피곤함 때문에 짐볼과 의자에 번갈아가며 앉았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짐볼에 앉아도 끄떡없다. 나를 보고 팀 동료들도 짐볼에 앉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책 TOP 3
‘왓챠’로 그때그때 기록해놓는 영화와 달리 책은 체계적으로 기록해두지 않아서, 순전히 현재 기억에만 의존해야한다. 다행히 아래 3개 중 2개는 블로그에도 적어놨었다.
- 욕망해도 괜찮아
책을 덮고 내린 결론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계속해서 경계를 넓혀가며 일종의 실험을 계속해야겠다. 그래야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고, 내 삶이 풍성 해질 테니까.
- Models: Attract Women Through Honesty
- 미국의 라이프 코치인 Mark Manson의 블로그는 비범한 통찰력이 담긴 글이 가득한, 내가 아주 좋아하는 블로그이다. 매우 세속적인 제목의 이 책은 단순히 ‘여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vulnerability)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강해지는 유일한 길이라는 역설이 담긴 아주아주 좋은 책.
- 4001
문득 내 기억들도 의심 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사오던 첫날, 정말 아파트 거실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을까. 또 자랑처럼 이야기하던 기억들은 정말 사실일까. 조금씩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기억을 조작한다. 그러면 내 기억이 100% 그대로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고 모든 사람이 어느 면에서는 신정아와 비슷한 사람인 걸까. 그녀가 처연해진다. 조작된 기억을 계속 굴려 앞으로 나아가 큰 눈덩이를 만들었던 죄가 참 무겁다.
나 ver. 32.9.9, 이제 업데이트 시점이 다가온다. 다들 알겠지만, 업데이트한다고 마냥 좋아지는 건 아니다. 업데이트를 후회하며 다운그레이드하고 싶다 아우성치는 사람도 있고, 더 심하게는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이번이 끝이 아니고, 계속 업데이트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ver. 33.0.0으로 업데이트하련다.